보이스피싱이 서민들의 재산을 갉아먹고 있다. 급전이 필요한 40, 50대 남성 자영업자를 노린 대출사기형 보이스피싱과 범죄·수사에 어두운 20, 30대 여성을 겨냥한 기관사칭형 보이스피싱이 잇따르고 있다. 최근에는 피해자 스마트폰에 '원격제어 애플리케이션(앱)'을 설치해 범행에 이용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원격제어 앱 깔고 검사에게 연락하라
대구에 사는 B(50) 씨는 지난 2월 중순 '55만7천원 결제 완료. 상품 출고 대기 중'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물건을 주문한 적이 없던 B씨는 해당 업체로 전화를 했고, 상담원은 "명의가 도용된 것 같다. 경찰에 사건을 접수하겠다"고 답했다.
이는 보이스피싱의 시작이었다. 잠시 후 서울경찰청 수사관을 사칭한 이가 "B씨 통장이 자금 세탁 용도로 쓰인 것 같아 휴대폰 조사가 필요하다"며 "원격제어 앱을 설치하고, 서울중앙지검에 전화해 이모 검사를 찾으라"고 안내했다.
수사관의 지시에 따라 스마트폰 원격제어 권한을 승인한 B씨. 이후 그는 인터넷에서 서울중앙지검 대표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미 B씨의 휴대폰은 보이스피싱범들의 통제에 들어가 전화를 거는 족족 범인들에게 연결됐다.
검사를 사칭한 이는 "조사가 필요하니 금융감독원 담당자와 연결해 주겠다"며 카카오톡으로 사건 관련 공문을 발송했고, 이후 B씨는 사칭한 금융감독원 과장 및 검사와 수차례 통화를 나눴다.
이들은 "계좌 추적을 해야 하니 계좌 속 모든 현금을 인출해 금감원 직원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모든 통화 내용은 녹취해 향후 증거로 사용할 예정이다. 전화를 끊으면 혐의를 인정하고 도주한 것으로 간주해 구속하겠다"는 협박도 일삼았다.
결국 B씨는 총 4천만원을 인출해 대전역에서 금감원 직원을 사칭한 사람에게 건넸다. 그는 "금감원 불법자금 확인 시스템을 통해 확인한 뒤 본인에게 돌려주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이후 검사를 사칭한 이는 B씨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으로 수사를 위해 대화 내용을 백업해가겠다"며 원격제어 앱 실행을 요청했고, 이를 통해 보이스피싱범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정보를 깨끗하게 삭제했다.
다음날 오전 결과가 궁금해 서울중앙지검으로 전화를 건 B씨는 안내 직원으로부터 "소속 검사 중 이모 씨는 없다"는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제야 B씨는 자신이 보이스피싱범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돈은 사라진 후였다.

◆범죄 수법 다양화, 범행 후엔 원격제어 앱 조작해 증거 인멸
6일 대구경찰청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범죄 유형은 ▷납치 빙자형 ▷기관 사칭형 ▷대출 빙자형 등으로 다양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가족을 납치했다며 돈을 요구하는 '납치 빙자형'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피해자 계좌 또는 개인정보가 범죄에 이용됐다고 속여 금품을 요구하는 '기관 사칭형', 저금리 대출로 유혹하는 '대출 빙자형'이 많다.
특히 최근에는 기관 사칭형이나 대출 빙자형 사기에 '팀 뷰어' 등 원격제어 앱을 설치하도록 유도해 피해자가 직접 범인에게 송금하도록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원격제어 앱은 개인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도록 해 제3자가 모바일뱅킹, 메신저, 전화 및 연락처 등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종섭 대구경찰청 수사2계장은 "원격제어 앱을 깔도록 유도한 뒤 '보안상 휴대전화 화면이 노출되면 안 되니 전화기를 뒤집어 놓으라'고 위협하고는 휴대전화 잠금번호, 계좌 OTP 또는 비밀번호를 묻고서 그의 자산을 모두 다른 계좌로 이체해 빼돌린다"며 "범행 후에는 통화·카카오톡 내역과 연락처, 범행에 쓴 원격제어 앱까지 모두 삭제해 증거를 없애는 치밀함도 보인다"고 했다.

◆지난해 피해액, 전년 대비 66% 늘어
보이스피싱 범죄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과거에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장년층이나 노인층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의외로 20~30대 젊은층 피해자도 꽤 발생하고 있다.
유형별로 보면 대출 사기형 범죄 피해는 남성(60.4%)이 여성(39.6%)보다 많고, 40대와 50대가 각각 33.7%, 33.5%로 다른 연령층보다 많았다. 수법별로는 피해자가 보유한 고금리 대출 다수를 저금리 대출로 전환해 준다는 '저리 대환대출' 피해가 615건으로 가장 많았고, 신용등급조정비를 요구하는 사례가 104건, 공탁예치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54건 등이었다. 사업·생활비 자금 마련이 급한 가장이나 자영업자일수록 꾐에 쉽게 넘어간 것으로 분석된다.
이와 달리 기관 사칭형 범죄 피해는 여성이 80.1%에 달했고, 20대와 30대가 각각 39.7%, 20.5%로 높게 나타났다.
경찰 관계자는 "기관 사칭형에 여성 피해자가 유독 많은 것은 수사기관의 수사 체계에 대한 이해도가 비교적 낮고 범죄 피해자가 됐다는 말에 겁을 먹어 당황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고 설명했다.
이 수사2계장은 "피해자들이 보이스피싱의 존재를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수법이 치밀하고 정밀하게 진화했기 때문"이라며 "상대방이 먼저 전화를 걸어 달콤한 유혹을 하거나 위협한다면 믿지 말고 일단 끊은 뒤 확인 절차를 밟을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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