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명화 속 숨은 이야기] ⑭화가와 모델

에두와르 마네 작
에두와르 마네 작 '철로'

에두와르 마네, 철로, 1872~1873, 99.3 x 111.5cm, 내셔널갤러리 오브 아트, 워싱턴

긴 머리의 젊은 여인이 무릎 위에 책을 펼친 채 우리를 향해 무심한 시선을 던진다. 등진 올림머리 어린 소녀는 한 손으로 철책을 잡고 방금 증기기관차가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연기를 쳐다보고 있다. 여인과 아이의 짙푸른 색과 흰색 옷, 검은 철책과 흰 수증기, 이렇듯 '철로'에서는 에두와르 마네(1832~1883) 특유의 밝은 톤과 어두운 톤을 병치하는 기법에 의한 콘트라스트가 돋보인다.

'철로'는 인상주의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마네가 클로드 모네(1840~1926)와 밀접하게 교류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모네는 흔히 사람들이 전형적인 인상주의 그림으로 여기는 '외광파'(plein-air), 즉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을 감각적인 색채와 빠른 붓 터치로 포착하는 화풍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반면, 마네는 빛, 속도, 가변성보다는 보다 견고한 것을 추구했다. 그는 이전 시기 대가인 티치아노, 벨라스케스, 고야의 화풍을 연구해서 독창적인 자신의 스타일을 이루어냈다.

1853년부터 파리는 시장 오스만 남작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도시계획 사업에 들어갔다. 덕분에 경제적 자립을 이룬 중산층, 다른 말로 신흥 부르주와들은 새로 생긴 대로와 카페, 극장과 갤러리에서 문화와 예술을 누리고 철로의 발달로 교외에서 행락도 즐기게 된다. '철로'는 이 시기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주제인 새로운 도시인의 생활양식과 정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파리의 부르주와 모녀로 설정된 '철로'의 여성 모델은 마네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2)와 '올랭피아'(1863)의 주인공인 빅토린 뫼랑(1844~1927)이다. 당시 화가의 모델은 지금의 연예인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었기에 뫼랑은 파리 사교계의 유명인사였다. 마네는 이상화된 누드의 서사나 상징체계를 거부하고 그림과 당시의 세계를 결부시킴으로써 모더니티를 표현했다. 기존의 그리스・로마 신화의 여신이나 뮤즈의 모습으로서의 누드가 아니라 당대의 실존인물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도발적인 눈빛으로 관람자를 직시하는 이 두 그림은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뫼랑은 16세에 토마 꾸뛰르 화실의 모델이 되었다. 단순히 화실이 아니라 미술학교였던 여기서 마네도 6년 동안 그림을 배웠다. 마네가 뫼랑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19살이었다. 우윳빛 피부와 부드러운 붉은 톤 헤어, 그윽한 눈빛을 지닌 뫼랑은 마네를 비롯해 당대 여러 화가들이 애호하던 모델이었다. 그녀 역시 1875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이후 공식적으로 화가로 인정받는 살롱전에도 당선되었다.

'철로'의 어린아이 모델은 생라자르 역이 보이는 마네의 작업실 이웃이자 친구인 알퐁스 이르슈의 딸이다. 뫼랑과 아이는 이르슈의 정원에서 생라자르 역을 출발한 기차가 지나간 배경 앞에 포즈를 잡았다. '올랭피아'에서 뫼랑의 발 옆에 꼬리를 빳빳이 세운 검은 고양이가 비스듬히 누운 그녀의 알몸을 쳐다보고 있다면, 이 그림에서는 하얀 강아지가 그녀의 넓은 소매에 편안히 목을 올리고 깜박 잠이 들어 있다.

1837년에 개통된 생라자르 역은 인상주의가 주류를 이루던 시기의 파리에서 가장 크고 복잡한 역이었다. '외광파'들이 흩날리는 붓놀림으로 표현한 산업화시대의 상징인 철재와 유리구조 역사, 복잡하게 연결된 선로 위로 자욱한 수증기를 뿜으며 떠나는 기차들은 시인 보들레르가 정의한 '현재라는 일시성과 시적 영원성'이 공존하는 모더니티의 단면을 보여준다.

마네의 '철로'에서는 고도의 기교와 심리적인 복합성이 나타난다. 관람자를 향한 뫼랑과 관람자를 등진 아이의 포즈에 두 인물의 상이한 마음이 함축되어 있다. 인물들 사이의 심리적 관계를 잘 잡아냈던 마네에게 떠나는 기차는 이별을 예고하는 장치이다. '철로'는 뫼랑이 1870~1871년 사이 미국에 체류하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시기에 제작되었고, 그녀가 마네의 그림에 마지막으로 모델이 된 그림이다. 마네는 뫼랑을 모델로 1860년대 초반부터 10여 년 간 그의 가장 대표적인 그림 여러 점을 남겼는데, 이 둘이 화가와 모델의 관계를 끝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뫼랑이 모델 일을 접고 화가로서 매진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뫼랑의 진품으로 확인된 두 점은 그녀가 살았던 파리 교외 꼴롱브의 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박소영(전시기획자, PK Art & Medi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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