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대표하는 학자로 고운 최치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신선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지는 최치원의 마지막 흔적이 대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최치원은 강수(强首), 설총(薛聰)과 더불어 '신라 3문장'(新羅 三文章)의 한 분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는 신라의 주도 세력인 진골 출신이 아닌 6두품 출신으로 868년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874년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할 정도의 수재였다. 876년 당나라의 선주(宣州) 율수현위(漂水縣尉)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에 올랐고, 885년 귀국할 때까지 많은 글을 남겼다. 역사에 잘 알려진 일명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도 불리는 '격황소서'(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유명하다.
29세에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헌강왕으로부터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로 임명된다. 그런데 당시 신라는 지방의 호족세력이 등장하면서 혼란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894년(진성여왕 8)에는 최치원이 개혁의 청사진을 담은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왕에게 올리고 6두품 최고의 관직인 아찬(阿飡)이 되었지만 진골 귀족들의 극심한 반발로 개혁을 이루지 못했다.
진성여왕 후임으로 효공왕이 즉위하자 최치원은 40대 초반 나이에 벼슬을 버리고 산천을 두루 다니다 가야산 입산 후 속세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최치원이 사라진 후 그의 나이 52세에 남긴 마지막 글이 바로 대구 수창군과 관련된 글이어서 대구로서는 큰 의미를 가진다.
908년(효공왕 12) 최치원이 지은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가 바로 그 작품이다. 수창은 대구 수성의 전신에 해당하는 신라시대 지명이다. '수성'(壽城)이 신라 때는 '위화'(喟火), '수창'(壽昌)으로 불렸다. 수창군 속현으로 대구현(달구화현), 화원현(설화현), 하빈현(다사지현), 팔거현이 있어, 대구 전신인 달구벌보다 수성구 전신인 수창이 상위 행정구역이었다.
'팔각등루기'에 의하면 대구지역 상류층인 호국의영도장(護國義營都將) 중알찬(重閼粲) 이재(異才)가 남령(南嶺)에 팔각등루를 세웠고 그의 부탁으로 최치원이 기문을 쓴다고 기록되어 있다. 앞산 대덕산성을 호국성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아래 기문 내용을 고려한다면 앞산 용두토성이 호국성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험한 산을 등지고 높은 언덕 위에 있으며, 절벽 아래 강물이 흐르고, 성곽 형태가 구름처럼 길쭉하다."
그러나 기문 내용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호국성을 중심으로 서쪽에 불좌(佛佐)못, 동남쪽으로 불체(佛體)못, 동쪽에 따로 천왕(天王)못이 있고, 서남쪽에 고성(古城)이 있는데 이것을 달불(達佛)이라 하며, 호국성의 남쪽에 산이 있는데 불(佛)산이라 한다." 즉, 달불성은 달성토성을, 불산은 앞산(성불산)을 의미한다. 이런 내용을 고려한다면 금호강변의 검단토성이 호국성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신라 3문장의 한 분인 최치원이 남긴 마지막 글이 대구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구로서는 엄청난 홍보거리를 얻은 셈이다. 차제 교육도시 대구의 이미지 제고와 도시 브랜드 홍보에 적극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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