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성의 '일상화된' 불안]<하>사랑이라 믿었는데...데이트폭력에 노출된 여성

여성 2명 중 1명은 데이트폭력 피해 경험…성적 폭력 피해율 3배
“보복 가능성 높아 은·엄폐되는 암수범죄 셀 수 없어”       

사랑은 일종의 마취제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는 합리화되고 정당화된다. 데이트 폭력은 사랑이란 가면을 쓴 범죄다. 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애인이 저지르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반복돼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믿어버리거나 혹은 보복의 두려움 떨며 쉽사리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때문에 데이트폭력은 수사기관이 인지하지 못하는 암수범죄로 가라앉는다.

◆간섭하고, 때리고…데이트폭력의 변주

여성 2명 중 1명은 데이트 관계에서 폭력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데이트폭력 피해를 경험한 비율은 여성이 남성을 웃돈다.

지난해 대구여성가족재단이 진행한 심층질문에 참여한 한 20대 여성은 "연애 초기에는 휴대전화를 뺏는 정도의 행동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팔을 세게 잡아당기거나 얼굴을 때리는 등 보다 심각한 신체적 폭력으로 진행됐다"고 털어놨다.

대구여성가족재단이 지난해 4월 여성 600명과 남성 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데이트 과정에서 언어·정서·경제적 피해를 입은 여성은 26.5%, 남성은 22.3%로 나타났다.

반면 신체적 폭력 피해 경험은 여성이 13.2%였던 반면, 남성은 8.8%에 불과했다. 원치 않는 키스나 성관계를 강요하는 등의 성적 폭력의 경우 여성이 16.8%, 남성이 5.3%로 3배 차이가 났다.

데이트폭력의 특징은 신체가 접촉되는 폭력일수록 여성의 피해율이 높다는 점이다. 행동 통제 등 비신체적 데이트폭력 피해는 남녀가 비슷했지만, 강압적인 신체 폭력 피해 경험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비신체적 폭력이 곧 신체적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구에 거주하는 30대 여성 A씨는 지난해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가 폭행을 당했다. 두려움에 떨던 A씨는 차량 번호와 이름까지 바꿨지만, 이후에도 헤어진 남자친구는 '얘기 좀 하자'며 A씨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트폭력은 당사자가 인지하지 못하는 작은 것부터 점점 진화해 간다. 강혜숙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대표는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은 사랑과 폭력을 구분하기 어려워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면서 "첫 폭력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강도가 높아지는 경향도 있다"고 했다.

◆가정폭력과 비슷한 데이트폭력…구속 확률 높고 암수범죄 많아

B(27) 씨는 몇 년 전 경북대 북문 횡단보도에서 황당한 장면을 목격했다. 커플로 보이는 한 남성이 여성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며 때리려는 시늉을 했던 것. B씨는 "당시 나를 포함한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연인 사이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사람이 다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데이트폭력 피해는 가정폭력 피해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이다 보니 '집안일은 집안에서 해결하라'는 식의 가정폭력과 마찬가지로 폭력의 원인과 결과 등 맥락은 온데간데없고 사적인 문제로 치부되기 쉽다.

김정순 대구여성의전화 대표는 "과거에 비해 많은 이들이 데이트폭력을 인식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인 관점은 그 폭력성에 대비해 상당히 너그럽다"며 "가해자가 상대방을 워낙 잘 알다보니 보복 등 2차 피해 위험성도 높다"고 말했다.

대검찰청 '범죄분석'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04년~2015년) 살인범죄 피해자 1만283명 중 피해자가 연인인 경우는 1천59명으로 전체의 10%를 차지했다. 특히 가해자의 77%가 전과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 재범 우려도 크다.

지난해 경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데이트폭력 현황'에 따르면 2017년 데이트폭력 건수는 1만303건으로 집계됐다. 하루 평균 28명이 데이트폭력으로 경찰에 붙잡힌 셈이다. 입건 건수는 2014년 6천675건, 2015년 7천692건, 2016년 8천367건으로 증가 추세다.

데이트폭력으로 신고된 경우 구속될 확률은 일반 폭력 사건보다 높았다. 2017년 대구에서 발생한 폭력사건 1만4천713건 중 170건(1.2%)만이 구속된 데 비해 데이트폭력 사건은 247건 중 19건(7.7%)이 구속됐다. 전국적으로도 일반 폭력사건 구속률이 1.5%인데 비해 데이트폭력은 4%에 달했다.

박영주 대구여성가족재단 여성가족팀장은 "이는 데이트폭력의 강도가 훨씬 심각함을 드러낸 것"이라며 "데이트 관계에서 비교적 가벼운 폭력은 경찰에 신고조차 되지 않는 암수범죄가 상당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여성들이 경험하는 데이트폭력은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임을 유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암수범죄(暗數犯罪) = 범죄가 실제로 발생했으나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거나, 용의자 신원파악 등이 되지 않아 공식적인 범죄통계에 집계되지 않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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