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8월 5일 집사람과 딸내미가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했다.
집사람은 딸내미를 업고 세탁소에서, 나는 식당에서 일했고 어느 정도 중국식당 운영을 파악하자, 인디애나주에 있는 일본 식당에 취직을 했다. 일본 식당을 알고 싶어서다. 그런데 휴가를 가서 자신을 생각해보니 사업을 해 본 적도 없고, 돈 버는 기술도 없고, 돈도 없고, 어떻게 식당을 할 것인가에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의욕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 집사람은 친정에 손을 벌려 보자고 했지만 죽으면 죽었지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다. 올바른 판단의 결론이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인가? 사방을 헤아려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용기를 낼 수밖에, 나에게 용기란 돈이 들어가면 안 되는 조건이 있다. 돈도 없고, 나올 구멍도 없으니깐.
'아! 찾았다 하나 있다 그것은 두뇌다.' 학교는 올바르게 다니지 못했어도 학교 다닐 때 받았던 수십 장의 우등상장과 상장들, 육군 일등병이 해병대 장교가 된 용기와 두뇌, 동기생의 간부, 새마을운동 지도자, 전부가 빈손으로 누구의 도움 없이 한 경험이 나는 있다, '아! 나는 머리가 나쁜 편이 아니야 집사람도 그렇고.'
나는 공부를 해서 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했다. 집사람과 함께 식당 일을 하면서 뉴욕, 엘 에이, 시카고, 등 대도시 한인사회 지인과 신문을 통하여 우리 영어 수준과 공부해서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보았다. 시, 주 공무원, 연방 공무원, 가리지 않고 찾았다
그 결과, 육군 군무원과 우체국 직업이다. 둘 다 연방 공무원으로 봉급도 은퇴 후 혜택도 좋았다. 유급 휴가와 병가도, 휴일도 많아 가족과 즐길 시간도 충분히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군무원은 우리 부부가 같이 근무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체국 시험을 보기로 했다. 영어도 그다지 많이 필요 없고 암기력을 위주로 한 시험이었다. 식당 퇴근 시간이 밤 10시, 매일 새벽 1시까지 시험공부를 하여 집사람은 인디애나주에서 만점을, 나는 99.8점을 받았지만, 응시자가 너무 많아 발령받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때, 다니던 식당이 장사가 부진해서 우리는 미시간주로 가야 했다. 마침, 지방정부에서 실시하는 직업학교(요트 제작)가 있어 거기를 수료하고 요트 공장에 입사하여 회사에 다니면서 우리 부부는 다시 시험에 응시하여 또, 집사람은 만점, 나는 또 99.8점을 받았다.
드디어 발령을 받아 상급 부서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임지로 왔다. 홀랜드시다. 더치페이로 유명한, 네덜란드 민족이 모여 사는, 식당에 가면 부부, 또는 가족끼리 손을 잡고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과 튤립 꽃, 풍차가 있는 인구 6만의 작은 도시다.
주로 백인이 거주하고 개혁교회가 많다. 옷을 기워서 입고 다닐 정도의 검소한 생활을 하며 자존심이 강한 민족 같다.
집사람은 아이들 때문에 나만 먼저 우체국에 출근해서 우체국장에게 첫 인사했다. 또 한 명이 있었는데 백인 여자였다. 그 여자 시험 점수는 99.6점, 나는 99.8점으로 내가 우선권이 있었다. 우체국장은 백인으로 미 육군에서 부사관으로 오래 근무한 노인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3개월의 수습 기간 동안 시험에 통과해야만 한다고 엄숙하게 말하고, 시험방법은 1200개의 주소를 암기하고 거기서 무작위로 뽑은 100개의 주소를 우체부 번호로 만들어진 공간에 지정된 시간 내에 적중률 95% 이상을 집어넣는 시험이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는 나만 따로 불러 종이에다 그 시험에 합격해야만 연방정부 공무원법에 의한 급여를 주지만 불합격하면 합격할 때까지 시간당 .5를 주겠다며 .5라고 썼다. 나는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는가 하고 백인 여자한테 물어보니 자기에게는 아무 소리도 안 했다는 것이다. 노조위원장에게 얘기하니 그는 봉급 주는 날, 진짜 그렇게 주는가 보자고 했다.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1200개의 주소를 암기하기 시작했다.
거의 백인인 우체국 안에는 노골적인 차별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면 코를 막고, 내가 갖다 놓은 우편물을 집어던지고 내가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으면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코를 손으로 가리며 일어서 나갔다. 동양인과 같이 근무하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는 것이고 마늘 냄새가 나고 더럽다는 것이다. 우체국장이 왜? 나에게만 .5라고 썼는지 알만했다.
우체국에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직원도 있고, 미군으로 한국에 근무한 직원도 있고, 한국 고아를 입양한 직원도 있었다. 그들이 한국에서 무엇을 보고 왔는가? 그것이 그들이 나한테 하는 행동이다. 측은하고 불쌍한 후진국 국민이 자기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속이 상한 것이다. '자! 그럼 나는 여기서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직분은 우편물을 판매, 접수, 분류, 관리, 우송, 그리고 우편배달을 제외한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일이다. 업무는 쉬운 것 같은데 직원과의 알력에 심각한 스트레스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절대 낙오란 있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 생각대로 후진국 사람처럼 불쌍한 시늉을 하여 동정받으며 지내야 하는가? 내가 그들보다 보수를 적게 받는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들보다 더 받고 또,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실, 나는 지금 막 시작했지만 나보다 직급이 낮은 직원이 있었다. 임시직, 우편물 우송직, 청소직, 등 여러 백인이 있었다. 단 하나, 실력으로 하는 것 밖에는 아무리 찾아도 없다. 나는 쫓기는 토끼가 될 것이다. 죽기 살기로 뛰는 토끼가 될 것이다. 백인들은 여기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지만 나는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다고 배수진을 칠 것이다.
나는 1200개의 주소를 일주일 만에 암기하고 일주일 동안 속도 훈련을 한 후 시험을 봤다. 96% 적중률로 합격했다. 우체국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무언가 잘못됐다고,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우체국장은 노조 위원장을 불러 다시 하면 어떠냐고 했고, 노조 위원장은 나한테 다시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좋다고 했다. 다른 백인들도 보고 있었다. 시험관이 "시작" 하며 스톱워치를 눌렸다. 그리고 내가 분류한 것을 검사했다. 100%로 합격이다. 우체국장은 한동안 '멍' 하고 있었다. 일주일 후 우체국장은 전 직원들을 모이게 하고 내 이름을 호명한 후 '우체국 기록상' 2주일 만에 1200개의 주소를 암기하고 합격 한 것은 처음이라면서 표창장을 주었다. 백인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후에도 나는 표창장 10번, 집사람은 3번을 더 받았다. 상금 아니면 특별 호봉 승급도 같이 받았다. 이렇게 되기까지 공짜는 없었다. 사냥개에 쫓기는, 목숨 걸고 달리는 토끼의 심정으로 쉬지 않고 노력했기에 있었다. 그 후 악질 우체국장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미국 성당에서 영세을 받을 때, 내 대부가 되어 내 손을 잡고 신부님 앞으로 나갔다. 그는 나를 아들처럼 대했다. 집사람과 나는 백인들이 싫어하는 휴일 근무를 도맡아서 했다. 휴일은 2배의 돈을 받았다. 악착같이 일을 하고 재투자를 했다. 스트레스로 인해, 우리 부부는 정신병 진단을 받고 의사로부터 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받아 유급 휴가로,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유급 병가를 이용해서 세계 여러 나라를 관광을 했다. 한국과 미국 48주 곳곳을 아이들과 캠핑을 갔다. 백인들이 우리 부부를 무시하고 시기하는 눈총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소포 분류하던 백인이 눈 보호 안경과 마스크와 고무장갑을 착용하고, 긴 집게를 들고 나한테 와서는 보여 줄 게 있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한국에서 온 소포가 터져서 내용물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멸치였다. 백인들은 기겁하며 물러섰다.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고 나한테 물었다.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하니 나를 쳐다보는 눈이 아프리카 식인종을 보듯 했다.
(7월2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 '어느 낙엽의 시' 6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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