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어리석은 믿음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순진했다. 2차 대전 승전국으로서 폴란드를 포함해 과거 러시아 제국 시절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되찾겠다는 스탈린의 속셈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처칠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내가 스탈린에게 모든 것을 주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면 그는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민주주의 세계와 평화를 위해 나와 손을 잡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믿음이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이 점령한 폴란드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에 합의했지만 지키지 않은 것이다. 1945년 2월 23일 얄타 합의대로 폴란드에서 자유선거를 위한 국제감시단이 발족하자 당시 소련 외상(外相) 몰로토프는 "선거는 소비에트 방식으로 치러질 것"이라고 선언했다. 2년 후 선거는 그렇게 치러졌고, 결과는 폴란드 국민이 결사반대한 공산화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가문의 멸족(滅族)도 어리석은 믿음 때문이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국(戰國) 통일의 점정(點睛)을 위해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가 머물고 있는 오사카 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오사카 성은 '넘사벽'이었다. 성을 둘러싼 깊고 넓은 해자(垓子)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쿠가와는 해자를 메우면 군사를 물리겠다고 히데요리에게 제안했다. 히데요리는 제안대로 했지만 도쿠가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성은 함락됐고 히데요리는 자결했다. 이에 히데요리 측 무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비겁자들"이라고 하자 도쿠가와는 이렇게 비웃었다. "세상에 적의 말을 믿는 바보가 어디 있나? 적장의 말을 믿는 바보는 죽어 마땅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7개국 뉴스통신사와 합동 인터뷰에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믿는다"고 했다. 세 차례의 회담에서 김정은이 빠른 시기에 비핵화 과정을 끝내고 경제 발전에 집중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음은 세상이 다 안다. 행동 없는 의지는 사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들었으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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