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으로 혼란스러웠던 시절, 대구에 레코드사가 있었다. 1947년 동성로 옛 자유극장 동쪽에 남선악기사가 있었는데, 그 한쪽 자리에 이병주가 오리엔트레코드사를 설립하였다. 그는 성주 출신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박태준을 만나 서양음악을 접하였다. 1948년부터 1951년까지 연예협회 대구지부장을 지냈으며, 1천여 곡의 대중가요를 만든 작곡가였다.
오리엔트레코드사의 1층은 레코드사, 2층은 다방이었는데, 그 2층에서 취입을 하였다. 여러 가지로 어려웠던 시절, 방음을 위해 군용 모포를 둘러치고 야간에 취입하였다. 잦은 정전으로 해서 NG를 내거나 틀린 부분을 지우고 다시 녹음하기를 반복하던 열악한 환경에서 90여 장의 레코드가 발매되었다. 노래로 셈하자면 180여 곡이 되는데, 그 가운데서 30여 곡이 크게 히트하였다.
그 시절 국내 음반시장은 침체기였다. 그러나 오리엔트레코드사와 대구의 가요계는 전성기였다. 이재호․박시춘․강사랑 세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신보 제작에 열정을 불태웠다. 또 신세영․남성봉․강남달․고화성․방초향이 앞 다투어 음반 취입을 하였고, 콩쿠르를 통해 도미․방운아를 가수로 발굴하였다. 그 시절 오리엔트레코드사는 대중가요의 산실이자 피란살이를 하던 연예인들의 사랑방이었다. 그 뒤 SP시대가 가고 LP시대가 열리면서 문을 닫았다.

그 시절 대구에서 발표되어 크게 히트한 대중가요 몇 곡을 살펴본다. 1951년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의 '봄날은 간다'를 백설희가 노래하였다. 이 한 곡 안에는 봄과 인생의 비밀이 다 들어 있다. 가사는 단순하지만 그 안에 수많은 풍경이 겹쳐져 있다. 2009년 100명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을 설문조사한 결과 1위에 선정되었다. 또한 뒷날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저마다의 창법으로 다시 부를 정도로 우리나라 가요사에 빛나는 절창이다.
1952년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의 '전선야곡'을 신세영이 불렀다. 이 노래는 박시춘이 남인수에게 주려고 만든 곡이었다. 그 곡에 탐이 난 신인 신세영이 자기가 부르도록 해 달라고 이병주에게 간청하였고, 반대하는 박시춘을 설득하여 신세영이 취입하였으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군가보다 더 많이 불렸을 뿐 아니라, 위문공연을 다니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1953년 강해인 작사 박시춘 작곡의 '굳세어라 금순아'를 현인이 불렀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강해인이 교동시장으로 냉면을 먹으러 가다가 피란민들의 고단한 모습을 보고 가사를 지었다. 박시춘이 하루 만에 작곡하였으며, 현인이 취입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그야말로 대박이 터졌다.

김 종 욱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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