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해 반을 써 온 칼럼을 끝맺게 되었다. 캄보디아 뿌삿 지방의 촌구석에서 처음 원고를 쓰던 2016년의 그날, 급히 돈이 필요했다. 손목을 다치고도 말을 못해서 눈물만 떨구던 어린 소녀와, 그렇게 아픈 딸내미를 데려온 앞 못 보는 아버지에게 병원비를 마련해 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 신문사에서 원고 청탁이 왔고, 그 덕에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당장 급한 상황에서는 미래의 천금(千金)보다 손 안의 푼돈이 훨씬 큰 법이다. 그래서 옛 라틴 격언은 이렇게 말한다. "빨리 주는 사람은 두 번 주는 사람이다!"(Bis dat, qui cito dat)
때맞춰 주는 정성이 두 배의 효과를 낸다면, 때늦은 호의는 차라리 아니 베푼 것만 못할 수 있다. 구약성경의 욥기는, 갑자기 닥쳐온 재난과 불행 앞에서 입에 발린 위로와 지청구밖에 건네지 않는 친구들의 무심한 말잔치를 묘사한다. 정작 필요할 때 입만 바쁜 친구들 때문에 욥의 고통과 회한은 더 깊어질 뿐이다. 구약의 시편도 이토록 쓰라리고 기막힌 상황을 통곡하듯 묘사한다. "나를 모욕하는 자가 원수였다면 차라리 견디기 쉬웠을 것을, 나를 업신여기는 자가 적이었다면 그를 비키기라도 했을 것을, 그러나 그것은 내 동료, 내 친구, 서로 가까이 지내던 벗, 성전에서 정답게 어울리던 네가 아니냐. 홀연히들 사라져버려라!"(시편 55, 12~14)
믿었던 이들에게 뒤통수를 몇 번 맞고 나면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고 세상이 삭막하게만 보이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하는 공동체지수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수년째 꼴찌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웃이나 친구 등 사회적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조사 대상 36개국 가운데 현격한 차이로 최하위를 기록한다.
전통적으로 '우리'와 '정'(情)을 강조하던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건축학자들은 급격하게 아파트로 옮겨간 주거문화의 변화가 그 원인의 하나라고 지적한다. 이웃 간에도 얼굴 보기 힘들어진 생활 패턴의 변화가 사람들의 심성마저 바꾸고 있다는 주장이다. 또 심리학자 김태형은 1997년 외환 위기가 한국인의 마음에 치유되지 않은 집단적 상처를 남겼다고 본다. IMF 시절을 돌이켜 보면 혹자는 금 모으기를 떠올리며 공동체 정신이 발현된 계기로 기억하겠지만, 금 모으기 이상의 영향력으로 한국 사회를 강타했던 것은 비정규직의 확산과 평생직장 개념의 붕괴였다. 누군가는 도산해서 갑자기 거리로 나앉을 때, 또 다른 누군가는 헐값에 매물로 나온 회사며 부동산을 쓸어 담던 기억도 완연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심리가 퍼지고 끊임없이 자기를 개발하라며 몰아치는 자기 학대가 만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구 복지국가들이 오늘날의 복지 시스템과 노동 문화를 일궈낸 것은 위기의 순간을 함께 견뎌낸 공동체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같은 급격한 사회 변화가 위기로 다가오는 즈음, 우리는 과연 공존의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까. 최저임금제나 노동시간 제한 같은 공동체 지향의 정책도 소화하지 못해 허덕이는 우리 사회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빨리 주는 것이 두 번 주는 것이라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미루고 나서야 나눔을 실천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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