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지에서 반백년 넘게 살면서도 고향에 어떤 명소가 있는지 잘 모른다. 무침회 골목에서 친구를 만나 반고개 주위를 거닐다 '반보기'라는 벽화를 발견했다. 말이 좋아서 벽화지 담벼락 몇 개에 그림을 서너 쪽 그려둔 것인데, 그마저도 관리가 되지 않아 '반보기'를 알리는 표지판도 없었다.
반보기는 여성의 외출과 친정나들이가 금기시되던 조선시대에 며느리에게 주어진 단 하루의 외출이었다. 시집살이가 고추당초처럼 매운 시절에도 근친에 대한 배려가 있어서, 딸과 어머니가 중간쯤 되는 곳에서 만나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하루를 보냈다. 지금은 사라진 풍습이지만 그 시절의 노랫말이 '반보기 구전민요'로 전해지고 있다.
'하도하도 보고저워 반보기를 허락받아/ 이 몸이 절반가고 어메가 절반 오시어/ 새 중간의 복바위에서 눈물콧물 다 흘리며/ 엄마엄마 울엄마야, 날 보내고 어이 살았노.' 딸의 하소연에 어머니가 응답한다. '딸아 딸아 연지 딸아!/ 너를 구워 먹을 것을 삶아 먹을 것을/ 금옥 같던 네 손이사 갈고리가 되었구나/ 두실 같은 두 볼이사 돌 족발이 되었구나/ 금쪽같은 정내 딸이/부엌 간지 다 되었네.'
칠 남매의 여섯째인 나는 어머니를 빨리 잃었다. 어릴 때부터 늙은 엄마만 봐왔다. 그 늙음이 연민을 불러일으켰는지 어머니가 늘 가련해 보였다. 두 아이가 다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몇 년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막내딸이 보고 싶으면 '시장에 갈래?' 하고 전화를 하셨다. 그러면 아기를 업고 달려갔다. 어머니가 아기를 받아 업으면 나는 장바구니를 들었다. 어머니와 큰 시장(서문시장)까지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기 키우는 이야기, 호박소주 내려줘서 잘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바쁠 것 없이 걸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반고개에서 큰 시장까지 가는 길이 우리 모녀의 반보기였다. 큰 시장에서 어머니와 국수도 사먹고, 순대도 사먹고, 아기 옷과 양말도 사고.
어머니는 말 수가 적은 분이셨다. 어머니라고 속에 재워둔 말이 없었을까. 도통 말이 없던 그 어머니의 '시장 갈래?'하는 요청은 사람이 그립다는 다른 말이었다.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고 난 후 전화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는데, 부를 때마다 뛰어갈 수 없어서 찾아뵙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 마음에 걸려 있다. 두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는 동안 얼마나 적적했을지. 택시를 타고서라도 갈 걸. 결혼할 때 어머니가 주신 내복이 아직 장롱에 있다. 어머니 마음인 듯 고이. 장정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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