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이해와 배려, 선진국의 품격

한윤조 사회부 차장
한윤조 사회부 차장

외국을 처음 나가 본 것이 대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어학연수라는 명목으로 부모님께 목돈을 받아 8개월간 영국에서 땡땡이를 칠수 있게 된 것이다.

굳이 뭔가를 배우려 하지 않아도 낯선 곳에서의 경험은 인생에 상당한 가르침을 남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8개월간의 난생처음 외국살이 속에서 정말 선연한 충격으로 뇌리에 박힌 한 사건이 있다.

그중 하나가 파업을 벌이고, 이를 대하는 영국인들의 태도였다.

당시 화물운송노동자들이 전국적인 파업을 벌이면서 영국 전체의 물류 기능이 완전히 멈춰 섰다. 대형마트와 슈퍼의 물건은 동이 났고, 주유소 저유고도 바닥을 드러냈다.

먼저 놀란 건 화물차 운전사들이 파업을 벌인 이유였다. 이들은 '더 많은 월급과 복지 혜택을 달라'고 파업한 것이 아니라 일자리 쪼개기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더 많은 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를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의 월급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겠다는 주장이었다.

하나라도 더 움켜쥐기 위해 아득바득 다툼을 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한 정말 '경이로운' 파업 사유였다. 더구나 고액 연봉을 받는 여유 있는 이들이 아니라, 고된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펼쳐 보인 파업 '철학'이어서 더욱 충격적으로 와닿았다.

파업을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 역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홈스테이를 하던 집에는 두 돌 된 아이가 있었는데, 태국 출신의 호스트마더는 "아이에게 줄 우유가 없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반면 영국인인 호스트파더는 "모두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것이니 조금의 불편은 참고 견디고 응원해야 한다"고 다독였다. 주변에 "왜 파업했냐, 불편하다"고 비난을 퍼붓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때 한창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혈기 넘치는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선진국'이란 단어에 상당한 반감을 가졌다. 경쟁으로만 내모는 정부의 '세계화, 국제화' 구호에 질렸고, 그 끝무렵 벌어진 IMF 사태를 목격하면서 "대체 롤모델로 삼아야 할 선진국이란 무엇인가"는 의문이 깊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아, 바로 이런 태도가 선진국이구나"를 체감할 수 있었다. 노동을 대하는 그들의 가치와, 사회 문화 깊숙이 배어 있는 이해와 배려가 느껴졌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분야를 막론하고 파업이 벌어졌을 때 가장 먼저 들려오는 단어는 '시민 불편'이다.

다행인 건 지난 20년 세월 동안 우리 시민사회가 상당히 많이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최근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들어가자 언론은 '급식 대란'을 부각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고된 노동을 하고도 9급 공무원 64% 수준의 임금을 받는 이들의 현실도 알렸다.

또 '불편이기보단 누군가의 권리를 지켜주는 일이라 생각해달라'며 가정통신문을 보낸 교장 선생님에서부터, '불편해도 괜찮아요'라고 메모지를 써 응원하는 학생들을 보며 새삼 20년 전 문화 충격이 다시 떠올랐다.

우린 아직 갈 길이 멀다. 넘어야 할 갈등과 반목의 숙제도 많이 남았다. 다만 이번 사태를 보며 우리 사회가 이해와 배려를 향해 한걸음씩 전진하고 있음을, 더구나 어린 학생들이 보다 넓은 포용력으로 사회문제를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한 것으로도 그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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