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정 부모님이 밭에 깨 모종을 옮겨 심는다고 해서 모처럼 일손을 보탰다가 외려 일을 그르쳐 놓은 적이 있다. 쪼그리고 앉아 한 이랑에다 모종을 심고는 흙을 잔뜩 덮어 손으로 꾹꾹 눌러 놨더니 엄마가 기겁을 하시면서. "아이고, 야야! 이러면 얘들이 숨을 못 쉰다 아이가" 하고 타박을 하셨다. 그래서 옆 이랑에서는 흙을 조심스레 살짝 덮었더니 이번에는 흙이 너무 적다고 하시는 거다. '어렵다, 어려워!'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식물이 자라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물과 햇빛, 흙이다. 셋 다 없어선 안 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흙이라고 생각한다. 식물은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기에 물이 적으면 적은 대로, 햇빛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어느 정도 견뎌낸다. 그러나 흙이 없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흙이 뿌리를 아늑히 덮고 있어야 줄기가 서고 잎이 나며 열매가 달린다는 것은 유치원생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뿌리를 덮는 흙의 양이 너무 많으면 어떻게 될까? 흙에 짓눌려 뿌리가 숨을 쉬지 못하면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호흡곤란으로 고사하는데 노거수의 뿌리가 땅 위로 드러나 있는 것도 뿌리가 숨을 쉬기 위해서라는 말을 나무 전문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모종이나 묘목의 뿌리를 덮어 주는 흙을 '북'이라고 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stdist.korean.go.kr)에서 '북'이라는 글자를 검색해 보면 '식물의 뿌리를 싸고 있는 흙'이라는 설명이 첫 줄에 있다. '북을 주다'는 말은 흙으로 식물의 뿌리를 덮어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북돋움' '북돋우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매사가 그러하듯이 북돋움도 적당해야지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문제가 생긴다. 인간관계에서의 북돋움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작가 이기주는 '언어의 온도'(말글터)에서 언어에는 그 나름의 온도가 있는데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가 저마다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용광로처럼 뜨거운 언어에는 감정이 잔뜩 실리기 마련이어서 말하는 사람은 시원할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정서적 화상(火傷)을 입을 수 있다고 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인데 상대의 마음을 돌려세우기는커녕 꽁꽁 얼어붙게 한다.
인간관계가 틀어지고 일에도 지장이 자주 생기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말의 온도'를 조절하지 못해서일 때가 많다. 필자 역시 너무 뜨겁거나 차가운 말로 이런저런 오해를 사고 소중한 사람과 소원해지기도 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말로 인해 정서적 화상을 입고 동상에 걸린 적도 있다.
어느 쪽이든 당시에는 마음이 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화상과 동상이 남긴 흉터가 옅어지고, 솔직하게 말해 준 사람을 향한 고마움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상처를 주고받았다고, 관계가 틀어졌다고 해서 언어의 온도 조절에 실패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기운을 북돋아주는 말,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말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거짓인 줄 알면서도 기분 좋은 말을 듣고 싶어 하고 직언에는 마음 상해한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너도나도 상처받았다고 호소하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말보다 진심을 담은 따뜻한 말 한마디, 너무 뜨겁거나 차가운 말이 아닌 적절한 온도의 말인 것 같다.
문학치료나 독서코칭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참여자들에게 곧잘 물어보곤 한다. 언어에 온도가 있다면 몇 도가 적당한지. 36.5도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의 건강이 유지되는 온도가 36.5도니까 우리의 언어 생활도 체온처럼 자연스러우면 좋겠다는 뜻이다.
반면 온도계가 가리키는 36.5도는 달갑지 않다면서 22~24도라고 답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쾌적한 가을 날씨처럼 인간관계에서도 시원한 온도가 유지되면 좋겠다는 대답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언어의 온도'를 다시 펴본다. 책은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언어 온도는 몇 도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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