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으로 아들을 만드는 도인이 있다. 그가 머무는 신전에 불이 났다. 강으로 뛰어들까 생각하다 죽음이 자신의 노년을 영화롭게 만들어주고 힘든 삶의 노고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생각한 도인은 불길을 향해 걸어간다. 불은 그를 죽이지 못했고, 그는 자신 역시 아들처럼 누군가에 의해 꿈꾸어진 환영인 것을 깨닫는다. 보르헤스의 소설이다. 그의 전집을 산 것은 2002년 가을이었다. 그 해에 똑같은 책을 두 질이나 사게 된 것은 낡은 슬리퍼 때문이었다. 두 질의 보르헤스 전집 중 한 질은 내 책장에, 또 한 질은 K고교 2학년 교실에 꽂혔다.
아들이 정형외과에서 깁스를 하고 있었다. 먼저 연락을 받은 담임선생님이 계단에서 미끄러진 제자를 병원까지 업고 가셨다. 제자를 병원에 내려놓고 수업을 위해 부랴부랴 돌아가시는 선생님의 등이 굽어 보였다. 아들의 한쪽 발이 되어 교실까지 따라 들어가는 날이 올 줄 몰랐다. 한없이 넓은 운동장을 감싼 느티나무 그늘이 길어 보였다. 등에 짊어지기 전까지 가방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아들이 지고 다닌 삶의 무게인 것도. 아들 친구들이 뛰어와 어깨동무도 해주고 가방도 받아주었다. 목발을 짚은 서툰 걸음이 꿈이 아닌 것을 깨닫게 했다.
책장에 꽂혀 있던 보르헤스 전집을 사방무늬 포장지에 쌌다. 선생님이 국어를 가르친다는 말을 들었다. 선생님이 책을 어떻게 하시더냐고 슬쩍 물으니 교실 책장에 꽂으시더라고 했다. '잘 하셨네.' 아들 친구들이 그 책을 한 번쯤 열어보지 않을까, 혹시 문학에 눈뜬 학생이 있을지도 모르고. '다른 책도 아니고 보르헤스 전집인데.' 문학 이론과 형이상학적 주제를 소설화시킨 경이로움을 설마 모른 체 할라고. 보르헤스는 평생 다섯 권의 단편집을 남겼다. 단편에 대한 그의 천착은 장님에 가까운 시력 탓도 있으나, 그보다는 압축미를 최대한 살린 단편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제자를 병원까지 업고 가는 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서툴러서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하는지 몰랐다. 부모보다 더 먼저 병원에 데려간 반 부모의 고마움이 생각날 때마다 머리를 숙인다. 어미가 소설이라는 환영에 잡혀 있는 동안 아들은 낡은 슬리퍼를 신고 위태롭게 계단을 오르내렸다. 삶은 꿈이 아닌데, 간혹 꿈을 꾸듯이 목발 짚은 아들을 본다. 지금 그 아들은 어른이 되어 바다 너머에서 환하게 웃고 있건만, 어미는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가슴을 졸인다. '조심해!'
장정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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