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여름날의 피서

동진스님 망월사 백련차문화원장

청포도 익어가는 여름이다.

푸른 입속에 알알이 영그는 포도송이가 싱그럽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설익은 송이들이 한 알 한 알 박혀 가는 덩굴 아래의 자리는 시원하다.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한여름 더위를 피해 휴가를 떠나는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동산의 무한서(無寒暑)를 생각한다. 벽암록(碧巖錄) 제43칙에 어떤 스님이 동산화상에게 질문했다 "더위나 추위는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더위도 추위도 없는 곳으로 가거라. 더위와 추위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더울 때는 그대가 더위와 하나가 되고 추울 때는 그대가 추위와 일체가 된다면 그곳이 바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다."

백낙천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려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지만, 항(恒)선사는 홀로 방에서 나오지도 않네. 선방엔들 무더위가 없으랴만, 단지 마음이 차분하면 몸도 시원한 것"이라고 읊고 있다.

다산은 1824년 여름에 쓴 시에서 '8가지 피서법'(消暑八事·소서팔사)을 소개했다.

솔밭에서 활쏘기, 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네 타기, 빈 누각에서 투호놀이하기, 대자리 깔고 바둑 두기, 연못의 연꽃 구경하기, 비오는 날 시 짓기, 달밤에 탁족하기, 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인데 현대 생활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꽤 효과적인 피서 방법이었다.
이 정도로 정신 무장을 하고 피서지로 떠나 보자.

한여름 찌는 더위를 뚫고 이곳에 찾아가면 여름의 시원함을 만날 수 있다. 빨간 꽃이 흐드러진 배롱나무 정원이다. 연못을 중심으로 가장자리의 둑방 길을 따라 고목의 배롱나무가 가지를 뻗고 가지마다 빨간 꽃무리를 피우며 정원을 온통 뒤덮고 있다. 꽃이 질 때면 꽃잎이 떨어져 붉은 융단 길을 만들며 연못의 가장자리에 떠 있는 모습이 붉은 꽃비가 내린 듯하다. 담양 명옥헌(鳴玉軒)이다.

명옥헌은 계곡물이 흘러 하나의 못을 채우고 다시 그 물이 아래의 연못으로 흘러가는 과정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옥구슬이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연못은 네모난 형태이고 연못 안에는 둥근 섬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정원에 많이 나타나는 방지원도(方池圓島),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음양 구조를 보여준다. 즉 우리가 사는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선조들의 우주관이다.

연못 위에 있는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규모의 정자다. 정자의 한가운데에 방이 위치하고 그 주위에 ㅁ자 마루를 놓았다. 젊은 시절 설레는 맘으로 혼자 여행하면서 이곳에 들렀다. 그 고졸함에 정신을 잃었다. 정자에 올라 무쇠 탕관에 물을 끓여 다관에 맑은 작설차를 우려 음다하면서 빼어난 자연에 감사드리며 눈을 떼지 못했다. 언젠가 나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와 같은 공간을 조성하리라.

그 여름 지리산 칠선계곡과 담양 소쇄원, 전주 덕진공원 홍련 밭에서 피서를 했다.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 편히 휴식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과 힐링을 하는 시간이었다. 많은 분들이 좋은 피서로 청포도 알처럼 맑은 삶이 알알이 박히기를 기대한다.

3년 전 해남 백용지에서 옮겨 심은 토종 백련이 망월사 연밭에 무수한 병사들이 창을 들고 서 있는 모습처럼 봉우리가 솟아올랐다. 하얀 백련은 군자의 꽃을 넘어 성자의 꽃이다.
부채는 땀을 식히지만 매미 소리는 마음을 식힌다고 한다.

망월사 백련차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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