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비록 무사시(도쿄 인근 옛 지명)의 들녘에서 썩어 가더라도 남겨지는 야마토다마시(大和魂·일본 정신)…."
일본에서 '근대 최고의 사상가'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도자'로 칭송받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이 막부에 처형되기 직전에 남긴 유서다. 사무라이의 기백이 느껴지는 유언 같지만, '극우 민족주의'라는 일본 근현대 사상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글이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조선과 만주, 그리고 중국의 영토를 점령하여 강국(유럽·미국)과의 교역에서 잃은 것은 약자에 대한 착취로 메우는 것이 상책이다." "오키나와를 손에 넣고 조선을 빼앗은 후에 만주를 무찌르고 중국을 제압하며…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유지를 이어받는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征韓論)'이다. 그가 조슈번(長州藩·현재 야마구치현)의 초가집에서 제자들을 훈육하면서 남긴 말과 글은 일본 제국주의 모토가 됐다. 일제가 조선과 만주, 중국을 침략하며 무자비한 수탈을 감행한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요시다 쇼인의 시대부터 구상되고 계획된 거대한 프로젝트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와 추종자들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자마자 몰두한 것은 한일병합이었다. 한일병합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모두 조슈번, 즉 현재의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한일병합의 선봉은 요시다의 문하였던 초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와 2차례 총리대신을 지낸 '일본 육군의 교황' 야마가타 아리토모다. 제2대 조선 통감 소네 아라스케,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을사늑약 당시 조선주둔군사령관이었고 제2대 조선총독이 돼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하세가와 요시미치도 동향 출신이다.
을사늑약과 한일병합 때 총리였던 가쓰라 다로도 마찬가지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전후로 조선공사직을 교대한 이노우에 가오루, 미우라 고로도 동향 선후배다. 1894년 제9여단장으로 한국에 진주해 경복궁에 난입하고 동학교도를 살해한 오시마 요시마사도 조슈번 출신으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외가쪽 고조부다.
일본에서는 한국병합은 조슈번 출신들의 '작품'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조슈번과 공동정권을 구성한 사쓰마번(薩摩藩·현재의 가고시마현) 출신의 역할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이들이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집단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주변 강대국의 간섭을 뚫고 한일병합을 추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들의 정체는 요시다 쇼인의 문하이거나 추종자다.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조슈인은 간악하다는 평판이 있다'고 쓸 정도로 집단의식마저 잡스럽고 조악했다. 야마구치현이 '극우파의 본향'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제 같은 야마구치현 출신인 아베 신조 총리를 보자.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요시다 쇼인이다. 그의 좌우명도 요시다가 즐겨 쓴 '지성을 다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至誠而不動者末之也)이다. 애독서 역시 역사소설가 후루카와 가오루(古川薰)의 '유혼록(留魂錄)의 세계'다. 유혼록은 요시다가 남긴 글을 정리한 책이다. 신조(晋三)라는 이름도 요시다의 수제자이자 메이지 유신의 초석을 놓은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로부터 따왔다.
아베 총리의 지향점은 온통 요시다 쇼인에 쏠려 있다. 그가 '전쟁할 수 있는 국가'를 외치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요시다의 극우 민족주의에 경도됐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도 조슈인들이 100년 전에 걸었던 그 길을 답습하고 있다. 무역규제, 교과서 왜곡 등으로 한국을 압박하고 괴롭히는 정책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으니 끝없는 역사의 악연을 떠올리게 한다.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그러했듯, 아베 총리의 선조도 정식 무사 출신이 아니다. 아베 총리의 가계는 쇼야(長屋)라는 유력한 마을 촌장가문이다. 그들은 출세와 권력을 위해 더 간악했고 독했다. 일종의 얼치기 사무라이다. 짝퉁 사무라이의 칼질은 궁극적으로 한일 국민 모두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한국과 조슈인의 악연이 대를 이어 계속되는 것이 두렵고 끔찍하지만, 꿋꿋하고 당당하게 헤쳐나가는 길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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