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서점 나들이

장정옥 소설가

장정옥 소설가
장정옥 소설가

토요일이면 딸의 주니어들을 데리고 서점으로 간다. 두 아이가 서점 나들이에 재미를 붙였다. 토요일 아침이면 여섯 살배기인 큰 아이가 전화를 한다. 김밥을 싸서 앞산 공룡공원이나 과학관으로 가기도 하지만 토요일만은 서점으로 나들이를 간다. 어린이 서점 코너로 데려가서 갖고 싶은 책을 한 권만 고르라고 하면 두 아이가 신이 나서 돌아다닌다. 사방 책으로 가득 찬 서점에서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딱 한 권만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기대와 선택의 즐거움을 주었던지 서점나들이를 꽤 즐긴다. 동화책 사이를 설치고 다니는 재미 외에도 아이들은 노트와 펜의 화려함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서점 나들이는 어른인 내게도 즐거운 놀이다. 어른에게도 마음을 쉬게 해주는 놀이가 필요하다. 청바지를 입고 음악실을 찾아다니던 시절에 날마다 찾아간 서점이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간 서점이 내 피안이었고 거기서 꿈의 태동이 시작된 것을 그때는 몰랐다. 교과서에서 이름만 듣던 세계문학과 니체와 까뮈를 처음 만난 곳. 동네서점은 잠시나마 현실의 나를 잊을 수 있게 해준 유일한 피안의 세계였다. 사는 게 너무 심심해서 날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날 생각에 빠져 있었다. 삶에 수많은 갈래의 길이 있는데 책이 내게 그 길을 가르쳐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새 책 냄새가 좋았을 뿐인데, 거기서 길을 찾다니. 무의식의 움직임이었던가 보다. 손이 벨 것처럼 팔랑거리는 책장을 넘기며 새 책 냄새를 맡고 있는 동안은 서점 주인도 모른 척 해주었다. 안경 쓴 그의 모습을 훔쳐보며 그렇게 지적인 모습으로 책을 파는 나를 상상했다. 그 서점 주인도 지금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책을 실컷 만지다 들고 나온 것은 백동전 세 개 값의 삼중당 문고였다. 손을 부끄럽게 하던 그 책을 달력으로 표지까지 입혀가며 아꼈다. 두 줄로 묶은 문고판을 삼십 년이나 들고 다녔다.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던 때에 그 책 묶음은 요요히 타는 촛불이 되어주었다. 뭔가 절실하게 바라볼 것이 필요했고, 책이 있어서 견뎌냈다. 아이나 어른이나 놀이가 필요하고, 마음 내려놓을 곳이 반드시 필요하다. 가슴에서 끓는 갈증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서점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던 그때, 책을 실컷 만지게 해주신 서점 주인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백 권을 묶어도 구공탄 두 장 무게도 안 되는 책을 사 모으던 그 기쁨을 가르치기 위해 토요일마다 서점 나들이를 간다. 장정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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