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친 폭풍과 장마가 끝나고 맑은 7월 창공에 뜨거운 여름빛이 진주알같이 반짝이는 능금을 비추어 방실방실 웃음을 띠우게 한다.
명산 대구능금 금년엔 일천일백 만관의 생산이 예상된다. 상점에 나란히 갖춘 능금은 궁춘에 초하에 걸쳐 한산하던 대구상계도 홍옥, 국광 등 반년 간 각종 과실의 출하로 활기를 찾고 있다. 어여쁜 대구능금 행복하여라!'(남선경제신문 1948년 7월 9일)
7월 땡볕에 대구사과는 진주알같이 반짝이며 결실을 손짓했다. 오죽했으면 '어여쁜 대구능금 행복하여라!'고 끝을 맺었겠나.
보릿고개인 4, 5월에서 초여름까지는 상점엔 팔 물건도 사러오는 사람도 거의 없는 춘궁기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홍옥이나 국광 같은 사과가 나오면 시장도 단연 활기를 띠었다. 그만큼 사과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대구사과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외화벌이가 되는 농산품이었다.
일찍이 대구사과는 명성이 자자했다. 대구에 지금의 품종과 유사한 개량종 사과가 들어온 것은 구한말 이전이었다. 당시의 신문은 1891년쯤 대구에 사는 미국인 선교사가 사과를 퍼뜨린 것으로 보도했다. 자신의 남산동 자택에 사과나무를 심은 것이었다. 정원수였던 사과나무는 몇 해가 지나면서 상업적 재배로 바뀌었다. 일본인들이 사과의 경제적 가치를 알았던 때문이었다.
그 이전에도 사과는 있었다. 능금과 사과는 품종이 달랐다. 하지만 개량종 사과가 들어온 이후 일일이 구분하지 않고 능금이나 사과로 번갈아 불렀다. 대구에서는 동촌을 중심으로 사과밭이 퍼졌다. 사과 농사가 본격화되자마자 대구의 대표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그 당시의 대구특산품으로는 사과 외에도 된장, 간장, 청주 등이 꼽혔다.
대구가 사과 생산을 주도하다 보니 해방 후에는 경상북도가 매기는 가격이 곧 전국적 기준이 되었다. 가격 산정은 생산비를 포함한 원가계산서와 업자 측의 가격신청서를 기준으로 했다. 시장 가격보다는 공정 가격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더라도 가게에서 소비자가 사 먹을 때는 이미 산지 가격보다 크게 오른 뒤였다.
해방 이듬해 설날을 앞두고 시장물가를 조사했다. 사과 한 개가 3원50전이었다. 당시 미나리 한 속이 10원, 두부 한 모는 1원50전이었다. 한 속은 채소 등의 작은 묶음을 일컫는다.
과일 중에는 국내서 재배되지 않았던 밀감이 한 줄에 150원으로 꽤 비쌌다. 지금의 감귤이다. 제철을 지나서 먹는 사과는 어땠을까. 밀감만큼 비쌌다. 생기가 없고 우글쭈글해도 한 개 200원을 넘나들었다. 그때의 사과는 군것질거리가 아니라 끼니보다 나은 보약이나 다름없었다. 배탈 난 아이에게 주스로 갈아 주거나 회복기 환자의 영양식이었다.
한국의 명물이었던 '어여쁜 대구능금'은 이제 온난화 등으로 대구를 떠났다. 한때 일본은 이런 대구사과를 대량 구매하겠다고 나섰다가 통관 직전에 취소했다. 625전쟁 직후였다. 남 덕분에 돈은 벌어도 남이 잘되는 걸 그때도 보기 싫어했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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