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물로 읽는 동서양 생활문화] 한글, 인류사 알파벳 발달과정의 최신 버전

김문환 세명대 교수
김문환 세명대 교수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영화 '나랏말싸미'

한글이 우리사회의 화두다. 빌미는 경상북도 '상주'와 영화 '나랏말싸미'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하며 전국을 8도로 나눌 때 상주에 경상감영이 들어선다. 경상도가 '경주'와 '상주'를 합친 말이라는 데서 상주의 위상이 묻어난다. 상주는 임진왜란 중 경상감영의 지위를 대구에 내준다. 상주 사는 배모 씨가 훈민정음 해례본을 갖고 있다고 해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라 불린다. 최근 대법원 판결로 상주본은 국가 소유로 최종 확정돼 논란을 일단락지었다.

한글 창제 과정을 다룬 조철현 감독의 영화 '나랏말싸미'가 24일 개봉한다. 세종과 신미대사라는 스님의 관계에서 이야기가 풀린다. 산스크리트 문자, 티베트 문자, 파스파 문자를 깨우친 신미대사가 세종에게 한글 창제의 영감을 안겼다는 게 골자다. 한글 창제의 독창성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터라 웬 산스크리트 문자? 웬 파스파 문자? 하고 놀랄 법도 하다.

▶훈민정음 창제과정 적은 해례본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새로 28자를 만드니…." 한글 창제 동기를 세종이 직접 밝힌 대목으로 '훈민정음 예의'라고 한다. 이런 좋은 뜻을 갖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담은 내용을 '훈민정음 해례'라고 한다. 간송미술관에 보관 중인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 간송본'이 그렇다. 상주본은 이 간송본과 함께 제작됐지만, 내용이 더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해례는 한글 자음을 발음기관인 입과 목구멍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모음을 천지인(하늘, 땅, 사람)의 철학적인 내용을 기초로 획을 더해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당사자들이 제작 동기와 제작 방법(발음기관 상형설+가획설)을 설명해 놓았으니 이보다 더 정확한 고증은 없다. 하지만, 독창적인 형태라고 해서 부호를 합쳐 소리 나는 대로 적는 '알파벳'의 보편적인 발달사에서 한글이 동떨어진 별개의 문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현 용재총화 '산스크리트 문자', 이익 성호사설 '파스파 문자'

조선 초기 문신 성현은 1499~1504년 사이에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 훈민정음이 산스크리트 문자, 실학자 이익의 사상을 1740년경 집대성한 '성호사설'(星湖僿說)에 한글이 파스파 문자를 참고했다고 나온다. 영화 '나랏말싸미'가 역사 기록을 근거로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세종의 작은 형인 효령대군이 승려로 있던 양주군 회암사로 가보자. 고려시대 거대 사찰이자 유교국가 조선에서도 왕실 사찰로 번성하던 절이다. 폐허 위 전시실에 부호 같은 게 새겨진 기와 여러 점이 탐방객을 기다린다. 기원전 7세기경 인도의 인도유럽어족 계열 백인들이 만든 산스크리트 문자다. 불경을 적은 문자다. 산스크리트 문자는 이웃 티베트로 가 티베트 문자로 변한다. 티베트 문자는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의 명으로 1269년 티베트 승려 파스파의 손에 의해 파스파 문자로 진화한다. 파스파 문자는 쿠빌라이가 세운 대원제국의 공식 문자였다. 동쪽 고려부터 서쪽 킵차크-한국의 우크라이나까지 모든 외교 문서는 파스파 문자였다. 1270년부터 대원제국의 속국 고려 왕족이나 고귀 관료, 승려들은 파스파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페니키아 문자가 지구촌 알파벳의 모태

지중해 해안가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로 가보자. 높이 1.4m, 길이 2.97m 아히람왕 석관 뚜껑에 170글자 38개 단어의 기원전 1000년경 문자가 새겨져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가장 오래된 알파벳이다. 페니키아 문자는 서쪽 그리스 문자-로마의 라틴 문자로 전파된다. 이 라틴 문자가 오늘날 지구촌 영어를 비롯한 모든 서양 언어를 적는 알파벳이다. 그리스 문자에서 갈라진 러시아 문자도 마찬가지다. 페니키아 문자가 동쪽으로 움직여 기원전 8세기 시리아의 아람 문자-인도의 산스크리트 문자-티베트 문자-파스파 문자로 발전한다. 중국 자금성 전각의 명패마다 보는 한자 병기 만주 문자도 티베트 문자에서 나온 알파벳이다. 태국과 인도네시아 문자, 유대인의 히브리 문자, 이슬람 문자도 모두 페니키아 문자에서 갈라져 나왔다. 15세기 등장한 한글은 인류 알파벳 발달사에서 가장 최신 버전인 셈이다. 뜻글자인 한자와 달리 부호를 연결해 소리 나는 대로 모든 것을 적을 수 있다는 알파벳의 기본 원리는 이미 고려 말 이후 우리 사회에 전파됐다. 이를 바탕으로 독창적 형태의 과학적인 최신 버전 알파벳, 한글이 등장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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