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하 강제징용자에 대한 대법원의 배상 판결로 야기된 한일 간 갈등이 정면충돌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 정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상 분쟁 해결 절차인 외교적 협의와 중재위 설치를 제안했지만 한국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일본이 오사카 G20 정상회의가 끝나자마자 우리 핵심 수출 품목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에 쓰이는 3대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를 발표하자, 한국 정부와 국내 민심은 격앙되었다. 죽창가와 국채보상운동, 12척의 배, 심지어 의병이라는 대일 항전 의지를 다지는 결기 어린 단어들이 등장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이 청구권 협정상 마지막 단계로 제안한 '제3국 정부에 의한 중재위 설치' 기한이 지난 18일로 끝났다. 고노 다로 일본 외상은 다음 날 "한국에 대한 필요한 조치를 궁리하겠다"고 협박조로 말했다. 일본은 지난 7월 1일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시키기 위하여 8월 말까지 관련 규정을 개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조치가 실행되면 일본 정부는 자동차, 가전, 전자 등 한국의 산업 전반으로 수출규제를 확대할 수 있다.
일본은 규제 조치를 발표하면서 징용 문제에 대한 보복이 아니며 안보상의 이유로 수출 관리 운용을 재검토하는 차원이라고 강변한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무역규제 조치 금지의 예외로 인정하고 있는 '국가 안보상 수출입 제한 조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본이 항상 주장하는 법치(法治)의 왜곡일 뿐 아니라,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 채택한 자유무역 이념과도 상치되는 꼼수이다.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경제무역 전쟁은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을 비롯한 국제질서를 훼손시킬 뿐 아니라, 양국 모두에 막대한 손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양국 간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일본의 여러 가지 구차한 핑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무역규제 조치는 지난해 우리 대법원이 내린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따라서 갈등 해소는 사태 발단의 직접적 원인이 된 대법원 판결을 치유하는 데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해결 방안으로서 한국과 일본의 관련 기업이 기금을 조성해서 보상하는 방안(1+1), 여기에 한국 정부가 참여하는 1+1+알파 등의 방안이 거론되곤 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이 군대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파기하였고, 54년간 일관되게 유지되어온 협정을 뒤집는 믿지 못할 나라라며 분개한다. 따라서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징용자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어떤 안도 수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로서는 대법원 판결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이러한 딜레마를 타개하는 방안으로 국제사법절차에 호소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국제사법재판소(ICJ)를 통한 해결을 제안하기도 하나, 제국주의 통치에 대한 ICJ의 비교적 관대한 태도와 일본의 ICJ 재판관 배출 경력 등을 감안할 때, ICJ보다는 청구권 협정에 규정된 중재위를 통한 해결이 더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청구권 협정상 분쟁 해결 절차를 수용함으로써 대한민국이 국제법상 법치국가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또한, 중재위 수락 시 이미 발표한 3개 규제 품목 철회를 조건으로 요구할 수 있으며, 일본의 추가 제재 조치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중재 과정에서 외교적 타협 도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유의할 점은 이 중재위 심리를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제로섬 게임으로 몰고 가지 말아야 한다. 향후 분쟁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양국 간 의견을 달리하는 협정에 대하여 제3의 권위 있는 객관적 기관에 유권해석을 의뢰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염두에 두고 대비하여야 한다. 양측 다 국수주의에 호소하는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성숙한 자세로 문제해결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새마을세계화재단 대표이사(전 주핀란드대사·국제법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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