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여곡절 거친 순종황제 어가길 방치, 도심 흉물로 전락...

24일 대구 달성공원 앞 순종황제 어가길에 잡초가 무성히 자라 썰렁한 모습을 하고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24일 대구 달성공원 앞 순종황제 어가길에 잡초가 무성히 자라 썰렁한 모습을 하고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대구 중구의 순종황제 어가길이 빛바랜 사업으로 전락하고 있다. 다크 투어리즘과 친일역사 미화 논란이 뜨거웠던 시절에는 관심이라도 받았지만 이젠 아예 잊힌 공간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

◆찾는 이 없고 통행만 방해하는 잊힌 어가길

순종황제 어가길은 달성공원 정문 건너편 달성공원로 8길 입구부터 시작해 도시철도 3호선이 지나는 달성로 입구까지 170m가량 연결돼 있다.

이 길에 조형물이라고는 높다랗게 자리 잡은 순종황제 동상과 이를 설명하는 돌비석, 그리고 황제 의자를 본떠 만든 '어좌' 모양의 포토존 하나가 전부다. 바닥에는 태극문양과 함께 붓글씨로 '순종황제 남순행로'라고 쓰여 있지만 무성하게 자란 잡풀 등으로 쉽게 알아보긴 어려울 정도다.

4살 딸과 함께 길을 걷던 A(39) 씨는 "사실 아이 때문에 달성공원을 가끔 찾지만 한 번도 어가길을 들러본 적은 없다"며 "역사적 사실조차 모호하고 치욕스런 역사를 왜 굳이 저렇게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통행에 방해돼 짜증난다"고 했다.

어가길은 과거 순종황제가 1909년 1월 지방 민정시찰을 위해 영친왕, 이토 히로부미 통감 등과 순행(巡幸·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을 했던 길이다.

1909년 1월 7일부터 1월 13일까지 대구·부산·마산을 순행한 것을 남순행,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평양·신의주·의주·개성 등지를 순행한 것을 서순행(서북순행)이라 한다. 이중 순종황제 어가길은 남순행 중 대구 방문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을사늑약과 군대 해산 등으로 극심한 반일감정과 항일의병운동이 일었고, 특히 1907년 대구에서 출발해서 전국으로 번진 국채보상운동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대구가 항일운동의 거점이 될 것을 두려워 한 일본이 민심을 무마하기 위한 방편으로 순종황제를 앞세워 순행에 나섰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설명이다.

이후 중구청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수창동, 인교동 일대(2.1㎞) 및 주변에 순종황제 동상, 역사가로, 쌈지공원 등을 조성해 관광상품화하겠다고 의욕적으로 나섰다.

◆역사왜곡 논란 여전, 광복절 기해 다시 철거 논란 불거질 듯

중구청의 순종황제 어가길 조성사업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1909년 당시 지도가 남아있지 않아 순종황제의 경로를 두고 수창초교를 중심으로 북쪽인지, 남쪽인지 등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중구청은 두 차례 자문회의와 남아있는 역사 자료 등을 토대로 '순종이 대구역에서 출발해 수창초교 북쪽을 지나 달성공원에 도착했다'고 일단락지었다.

순종황제 동상을 두고는 역사왜곡 논란도 불거졌다. 2017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및 지역 23개 시민단체는 "당시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일제에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의도로 순종황제에게 강요한 순행이었던 만큼 굴욕적인 어가 행렬을 다시 들춰내 역사를 미화하려 한다"며 순종황제 동상 철거를 촉구했다. 중구청 측은 "역사적 비극에 따른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다크 투어리즘' 현장으로 의미가 있다"며 맞섰다.

이런 역사미화 논란은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는 다음 달 15일 광복절을 맞아 대구시에 친일 역사 재조사와 청산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낼 예정이다.

대구지부 관계자는 "순종황제 조형물 철거를 주장한 이후 꾸준히 학회 등을 통해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청산해야 할 수치의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순종의 행보는 일제에 순응한 부끄러운 모습인 만큼 이를 상징하는 조형물 역시 당연히 철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