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흥]대구에 온 듯 뜨거운 중국 서안... 대구와 달리 광활한 벌판

서안은 중국의 교통요충지, 어디로든 2시간 이내... 단, 비행기로
병마용, 진시황릉은 일찌감치 세계문화유산... 도용과 눈 마주치면 입이 쩍
화청지도 볼 거리... 당 현종과 양귀비 사랑 소재삼은 장한가도 권할 만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 병마용의 모습. 갖가지 자세와 형태로 서 있는 병마용은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생생하다. 김태진 기자 novel@imaeil.com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 병마용의 모습. 갖가지 자세와 형태로 서 있는 병마용은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생생하다. 김태진 기자 novel@imaeil.com

흡사 대구에 온 느낌이다. 공항 밖으로 나와 한 번 더 확인한다. '西安', 명확하다. 주변을 둘러본다. 눈길 닿는 지평선까지 산이 걸리지 않는다. 분지가 아닌데 이토록 뜨겁다니. 도시만 아니라면 영락없는 벌판이다.

천년수도라는 우리의 경주, 일본 교토에 비유당하는 곳이다. 원, 명, 청의 수도 북경(北京)말고도 천년수도가 하나 더 있는 거다. 명멸한 왕조 수에 비례해 영욕의 옛 수도가 있다. 1천년이라면 정통성에서 '띵하오(頂好)'다. 중국은 규모의 싸움터다. 명함 한 장이라도 내밀려면 크기나 역사가 받쳐줘야 한다.

많다보니 추려주는 요점 정리식 나열이 흔하다. '4대 천왕', '4대 미인', '10대 관광지'라며 손에 꼽는다. 중국식 분류법이다. 어울리지 않는 불순물이 보인다 해도 그러려니 넘겨야 한다. 많아서다.

◆오랜 도읍지 서안

중국 4대 공연 중 하나로 꼽히는
중국 4대 공연 중 하나로 꼽히는 '장한가'의 무대장치가 화려하다. 배경으로 놓인 려산(驪山)까지 활용, 달과 별로 보이게 만들어 공연하고 있다. 김태진 기자 novel@imaeil.com

서안은 13개 왕조, 73명 황제가 1천년 하고도 62년 동안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서안이라는 이름보다 옛 이름인 '장안'이라 기억한다.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는 말의 원조다. 후한시대 때부터 본격적인 수도로 자리한다. 삼국지에서도 촉나라의 제갈공명은 장안을 점령하기 위해 6번이나 출정한다.

수나라, 당나라도 이곳을 도읍으로 정했다.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1천년 넘게, 물론 쭉 이어진 건 아니지만, 수도였다. 세계사 수업을 복기하면 장안은 실크로드와 세트로 묶인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로마,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당시 세계 3대 도시였다. 현재는 중국 협서성(陝西省)의 성도다.

서안은 교통접근성에서 중국의 중심이다. 우리로 치면 대전쯤 된다. 어디로든 이동하기 좋다며 지도를 펼친다. 중국대륙 가운데다. 사방팔방 어디로든 비행기로 2시간 이상 가야한다. 정말이지, 그만큼 넓다.

중국은 '많다'와 '넓다'를 전제로 깔아야 한다. 많아서, 넓어서 누리는 장점은 흔히들 말하는 '대륙의 스케일'로 반영된다. 서안의 대표 관광지는 대륙의 스케일에 부합한다. 최대 다수의 만족을 위해 공연 무대는 넓었고, 산에 별을 박아 반짝이게 했고, 달을 띄웠다.

◆화청지(華淸池)

역대 왕조의 왕들이 애용한 온천욕장 화청지 입구에 관광객들이 몰려있다. 김태진 기자 novel@imaeil.com
역대 왕조의 왕들이 애용한 온천욕장 화청지 입구에 관광객들이 몰려있다. 김태진 기자 novel@imaeil.com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목욕 놀이 공간으로 소개된다. 실제로는 역대 왕조의 왕들이 애용한 온천욕장이었다. 서주(西周) 시대부터였다. 진시황은 물론 한무제까지 이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화청지=양귀비'로 굳어진다. 현종과 양귀비의 역대급 막장 러브스토리가 워낙 강해서다.

온천공을 보고 싶었으나 막은 지 꽤 된 듯했다. 규모로 압도하는 욕장 크기로 전성기를 추측할 뿐이다. 온천욕장의 기능은 잃었지만 이곳에서 열리는 야외공연은 장안의 화제였다. '장한가(長恨歌)'다. 현종과 양귀비의 못다 이룬 사랑을 주제로 삼은 백거이의 장편 서사시가 원작이다.

장한가 공연은 중국 4대 공연으로 꼽힌다. 무대 규모에 입부터 벌어진다. 규모가 큰데도 세심한 무대장치에 벌린 입을 다물 수 없다. 뒷산에 별처럼 보이는 조명을 설치했고, 산등성이에 달이 뜬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중국어를 몰라도 보는 데 지장이 없다. 배우들의 몸짓으로 스토리를 짐작한다.

공연
공연 '장한가'에서 당 현종과 양귀비가 춤을 추고 있는 장면. 김태진 기자 novel@imaeil.com

양귀비는 한나라 왕소군과 초선, 월나라 서시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통한다. 그래서 중국학자들이 고증을 했다고 한다. 양귀비는 신장 158cm, 몸무게 75kg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현종이 글래머형 미인상에 빠져 있었다는 해석은 약하다. 오히려 양귀비의 내공이 현종을 사로잡았다는 풀이가 우세하다. 음악과 춤이었다. 현종 역시 음악을 좋아해 그에 맞춰 춤을 추는 양귀비에 더욱 반했다 한다. 척하면 탁하고 알아주는 호흡이 사랑의 중요 조건임을 현종과 양귀비가 입증해준다.

◆서안성벽

서안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는 서안성벽의 모습. 성벽 안으로 여러 대의 버스를 주차를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을 자랑한다. 김태진 기자 novel@imaeil.com
서안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는 서안성벽의 모습. 성벽 안으로 여러 대의 버스를 주차를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을 자랑한다. 김태진 기자 novel@imaeil.com

서안시내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서안성벽이다. 명나라 초기 때 수리한 성벽치고 보존이 잘됐다는 느낌이었는데 역시나 중창된 것이었다. 1643년 이자성의 난 때 불탔다. 명나라 말기 국운이 쇠했을 무렵 서안성도 무너졌다.

내성 둘레가 13.7km다. 12m 높이를 오르면 성벽 안이다. 일본의 중국침략기에는 성안에서 피난생활을 이어갔을 만큼 고마운 곳이다. 방어용 성벽은 관광지로 바뀌었다. 12~15m 폭의 성벽 안에서 자전거(City Wall Bicycle)를 탈 수 있다. 달려도 좋다.

성벽 안에는 자전거도 지나고 때론 자동차도 지난다. 바닥이 튼실하다는 증거다. 가로 40cm, 세로 20cm 바닥돌이 일정한 규격으로 아귀를 맞추고 있다. 깨지고 파인 흔적도 적잖다. 노포에서 만난 손때처럼 수난을 견딘 공로로 인정해줄 만했다.

그런데 실은 1984년 이후로 보강한 것들이다. 바닥돌에 '八四周村'이라고 선명하게 찍혔다. 중국에서 보기 힘든 네 글자 이름이 자주 보인다 했더니 벽돌회사 이름이다. 착착 쌓인 벽돌을 딛고 장락문(長樂門)에서 시내를 바라본다. 시내에 고층 빌딩이 없다. 10층 이내 고도제한이 걸려있다고 한다.

정부 주도로 만들어지는 것들이 일사불란하다. 마침 비한자권 외국인도 외울 수 있을 만큼 곳곳에 쓰여 있는 '掃黑除惡'가 보인다. '어둠을 제거하고 악을 없애자'는 구호다. 중국판 범죄와의 전쟁이다. 지난해부터 3년 시한으로 추진 중인 캠페인이라는 설명이 들린다.

◆병마용

표정이나 모양이 제각각인 병마용이 늘어서 있다. 진시황이 자신의 황릉 도굴을 방지하려고 쓴 위장술 중 하나로 추측된다. 황릉과 병마용 간 거리는 1.5km다. 김태진 기자 novel@imaeil.com
표정이나 모양이 제각각인 병마용이 늘어서 있다. 진시황이 자신의 황릉 도굴을 방지하려고 쓴 위장술 중 하나로 추측된다. 황릉과 병마용 간 거리는 1.5km다. 김태진 기자 novel@imaeil.com

서안을 진나라의 수도로 오인하기 쉽지만 진나라의 도읍지는 함양(咸陽)이었다. 서안국제공항이 있는 곳이다. 함양에서 꽤 떨어진 거리에 병마용이, 병마용과 또 거리를 두고 황릉이 있다.

병마용은 일찌감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미스터리급 문화재다. 3개의 구덩이, 갱으로 나뉜다. 전차병, 기마병, 보병이 섞여 있는 2호갱과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청동병기 등이 출토된 3호갱까지다.

1979년 개방됐다는 1호갱에 들어선다. 꽤 큰 학교의 대강당에 들어온 느낌이다. 아래로 도용들이 서있다. 표정이나 모양이 제각각이다. 172~192cm로 신장도 다르다. 머리 따로, 몸통 따로, 팔 따로, 다리 따로 제작해 연결했다. 섬세하다. 손금이 보이고 신발 바닥 무늬까지 남아 있다. '쓸데없이 높은 퀄리티 아니냐'는 말은 일견 타당하지만 중국인들은 질투로 듣는다.

사진 앞쪽 병마용들은 멀쩡히 서있지만 뒤쪽으로 갈수록 부서진 것들이 보인다. 멀쩡해 보이는 것도 일부는 깨진 것들을 조합해 붙인 것이다. 3호갱까지 있는데 아직 발굴되지 않은 곳이 더 많다고 한다. 김태진 기자 novel@imaeil.com
사진 앞쪽 병마용들은 멀쩡히 서있지만 뒤쪽으로 갈수록 부서진 것들이 보인다. 멀쩡해 보이는 것도 일부는 깨진 것들을 조합해 붙인 것이다. 3호갱까지 있는데 아직 발굴되지 않은 곳이 더 많다고 한다. 김태진 기자 novel@imaeil.com

역사적 가치 외에도 미술사적 의미가 있다지만 절대권력의 속성을 연구하는 학문에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진시황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을까. 진시황은 젊어서부터 지속적인 살해 위협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죽어서도 무덤이 발견되지 않길 바라는 욕구가 무한권력과 합쳐지면서 여러 사람을 잡았다.

그렇게 난리를 쳐 만든 병마용은 우연히 세상에 알려졌다. 1974년 농부가 감나무밭에서 우물을 파다 발견했다. 3m쯤 파들어 갔을 때 불로 구워 만든 덩어리가 나왔고 좀 더 파다 병마용을 발견했다고 한다.

◆진시황의 불로초

진시황(秦始皇)을 풀이하면 진나라를 시작한 황제란 뜻이다. 후세엔 #불로초 #분서갱유 #최초중국통일 #최단기통일왕조 등의 키워드로 남아있다.

불로초를 구하다 죽음을 거스를 수 없었던 진시황이다. 숨진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다. 그중 황당하면서도 헛웃음이 나오는 걸로 우선 순위에 거론되는 건 독극물 과다 섭취설이다. 불로초라 해서 갖은 약초를 다 구해 먹다보니 간이 해독을 하지 못했다는 추측이다.

아무리 좋은 약초라 해도 정도껏 먹어야한다는 건 요즘 한의학에서도 지적하는 바다. 암세포를 공격한다며 이상한 풀뿌리 씹어 먹다가 간을 공격당한 암환자들이 더러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조금 더 황당한 우스갯소리로 수은을 불로초라며 갖다 바쳤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이게 다수설이자 유력설이다. 독성이 강한 중금속 수은 때문에 피부가 팽팽해지자 그걸 불로초라 믿었던 것이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용맹하게 스스로를 공격한 셈이다.

◆진시황릉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을 지킬 병마용을 속임수로 활용했다. 황릉을 지켜주는 의미의 병마용이 발각되면 가까이에 황릉이 있을 것으로 혼선을 줄 것이란 계산이었다. 황릉과 병마용은 1.5km 떨어져 있다.

병마용 일부가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된 걸로 되짚어보면 진시황의 계산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병마용은 황릉을 지켜주는 기능을 충분히 했다. 끝까지 진시황릉은 도굴되지 않았다. 시신에도 통증을 느끼는 감각이 남아있다고 생각한 건지, 영원의 삶이 있다고 여긴 건지 무덤에 집착했다. 진시황이 왕위에 오른 건 13세였지만 20세 때부터 왕릉 조성을 지시한다.

토목의 달인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토목 공사가 많았다. 만리장성이 대표적이다. 당시 중국에서 동원되지 않은 성인 남성이 없었을 만큼이라니 장기 군역이나 마찬가지였다. 토목 공사로 시작해 토목 공사로 끝난 기간이었다. 기록으로 좀 남겨뒀더라면 후세에 기여하는 바라도 있었겠으나 자기 무덤을 만든 사람 모두를 죽였다.

황릉 조성을 위해 수많은 목숨을 날리고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생쇼를 한 것치고는 왜소한 크기의 무덤이다. 무덤 위에 나무를 잔뜩 심어 밖에서 보면 자그마한 야산으로 보인다. 원래 황릉의 높이는 120m가 넘었다고 한다. 40층 짜리 고층아파트 높이다.

중국의 스케일에 질려 크게 부풀린다는 느낌이 들지만 기록에 남아있으면 반박하기 어렵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이 일부 있다. 게다가 구설이 아니라 현장을 찾아 측량한 기록이다.

※취재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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