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엑시트 리뷰

영화 '엑시트'
영화 '엑시트'

'엑시트'(이상근 감독)는 깨알 맛이 나는 한국형 재난영화다.

많고 많은 동아리 중에 '쓸 데 없는' 산악동아리를 나온 용남(조정석). 대학 졸업 후 몇 년 째 취업 실패로 눈칫밥만 먹고 있다. 온 가족이 참석하는 어머니의 칠순 잔치에서 대학시절 짝사랑했던 의주(윤아)를 우연히 만난다. 그러나 갑자기 유독가스 테러로 도시는 아비규환이 되고, 용남과 의주는 산악 동아리의 기술들을 동원해 탈출을 감행한다.

재난영화는 거대한 재앙에 맞선 나약한 인간의 대결 구도다. 빌딩이 불에 타오르고, 토네이도가 휩쓸고, 쓰나미가 몰려오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애와 가족애를 발휘하며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언제나 감동을 준다.

그러나 최근 재난영화는 재난에 치중했다.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영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의 오만일까. '투모로우' '2012' 등은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재난을 종합선물세트처럼 만들어냈다. '크기가 좌우한다'(Size does matter!)는 홍보문구처럼 사이즈만 크면 다 스펙터클할 줄 알았다.

그러나 놓친 것이 있으니 바로 재난영화의 생명인 긴장감이다. 과도한 컴퓨터그래픽이 오히려 재앙이었던 것이다.

영화 '엑시트'
영화 '엑시트'

'엑시트'는 유독가스가 도시에 퍼져 시시각각 올라오는 가운데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남녀를 그린 영화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재난이 거대하지는 않다. 그러나 건물 위로 올라갈수록 스멀스멀 따라 올라오니 탈출이 끝이 없다.

재난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설정들이 있다. 무능한 정부의 대응과 책임자에 대한 비난 등이다. 그러나 '엑시트'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 없이 오로지 탈출에만 매진한다. 그것도 만년 취업재수생으로 집안의 수치(?)였던 막내아들이, '쓸 데 없던' 산악 동아리의 기술로, 짝사랑했지만 쓰라린 버림을 준 그녀와 함께 하니 말이다.

'엑시트'가 철저히 한국형, 생활형에 집중한 것은 영리한 선택이다. 용남은 '쓸 데 없어' 보이는 캐릭터다. 하루 종일 놀이터 철봉대를 잡고 있다 보니, 아이들에게도 놀림감이 된다. 조카도 삼촌을 창피해 한다. 어머니 칠순잔치에서도 아들은 이 집안에서 결코 자랑스럽지 않다.

의주 또한 매니저에게 추행을 당하면서 항변하지도 못하는 사회 초년생이다. 절망의 순간에는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는 아직 연약한 인물이다. 이들이 선한 마음으로 위태로운 순간에 서로를 도우며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관객에게 고소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쓰레기 종량제 봉투로 온 몸을 감싸고, 아령을 던져 탈출을 시도하고, 노래방 기계로 도움을 청하는 생활형 설정들도 재미를 준다. 고무장갑과 포장용 테이프, 어디에나 있는 상패 등 흔한 생활 용품들이 탈출 도구로 쓰이면서 한국형 코믹의 재치를 더한다. 또 전문 장비가 아니다보니 용남이 로프를 벗어던지고 위태롭게 건물 외벽을 타는 장면 등은 짜릿한 긴장감을 던져 준다.

영화 '엑시트'
영화 '엑시트'

재난영화이면서 밝은 색감을 유지하는 것은 이 영화의 장점이다. 어머니한테 리모컨을 빼앗긴 드라마 애청자인 아버지(박인환), 못난 아들이지만 생명보다 더 아끼는 어머니(고두심), 야단을 치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돈을 주는 누나(김지영), 장모님 사랑에 빠진 사위(정민성) 등 가족들의 묘사는 관객의 공감을 100% 끌어낸다. 고두심, 박인환, 김지영, 황효은, 이봉련 등의 출연 그 자체로 이미 '엑시트'의 캐릭터 설정은 끝났다.

조정석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걸그룹 소녀시대 멤버이자 배우인 임윤아의 사랑스러운 연기도 잘 어울린다. 으레 로맨스로 치달을 수도 있지만 거리를 유지한 것도 적절하다.

그러나 둘이 오열하는 장면에서 대사를 전혀 들을 수 없었던 것은 아쉽다. 최근에 본 한국영화에서 공통적인 아쉬움이다. 한국영화를 보면서 자막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103분. 12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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