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머리를 열며》
아직 연륜을 들먹이기 뭣한 입장이지만, 육신의 나이테 한 줄씩 늘어갈수록 애벌레 무렵의 기억들이 문득문득 되살아나곤 한다. 덧없이 흘러간 세월 중에서 가장 순수했던 동심시절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본들 진저리쳐질 만큼 고달팠던 삶이 제일 먼저 떠오름에도, 그 속에서 피어나던 가족애와 이웃간의 정과 끈끈한 인간미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수십 년이 지난 요즘 시절에야 대부분 사람들이 먹을 걱정 하나는 덜어냈을지 모르나 오히려 심리적으로 혹독한 보릿고개를 넘고 있다. 집집마다 숨겨둔 근심거리 한둘씩은 있기 마련이고, 빈부 양극화의 소용돌이에 휘둘리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지만, 쓸 만큼은 소유하였음에도 못 갖추었다고 안달하는 무한물욕은 아닐까.
차가울수록 따뜻함을 안다. '우린 이렇게도 살아왔어.' 요즘 세대에겐 가장 듣기 싫은 넋두리를 늘어놓기보다, 그런 시대를 함께 겪어낸 사람들끼리라도 공감할 수 있을까하여 해묵은 추억갈피를 뒤적인다.
《문창호지 바르는 날》
산이 높아 골짝도 깊은 강원도 횡성에서도 가장 오지이다 보니 비좁게 들어앉은 마을 터, 동네 앞을 흐르는 개울 때문에 돌려난 듯 외져서 처음 온 사람은 누가 이런 데까지 찾아내 처음 터를 잡았을까 감탄할 정도였다. 대여섯 집 중 하나는 그나마도 둔덕너머에 있어 초가지붕 용마루만 겨우 보일 뿐.
가을꽁무니 바람 한 줄기가 후다닥 앞질러가며 나뭇가지들을 모조리 흔들어놓는다. 가래나무라고 그냥 둘 리 없다. 나무 밑으로 다가가니 새로 떨어진 열매들이 여러 개 널려있다. 고무신발로 내리밟자 울퉁불퉁 동글갸름한 추자 알이 툭 튀어나온다. 냉큼 주워서 어른들이 하는 걸 본대로 손아귀에 넣고 힘주어 비빈다. 하지만 길들지 않아 달그락 소리는커녕 손바닥만 아프다. 에라, 고소한 알맹이나 꺼내먹어야겠다.
딱딱한 껍질을 깨려고 막돌을 주우러 다니던 나는 하늘의 해를 쳐다보고 깜짝 놀랐다. 이제야 엄마 심부름이 생각난 것이다. 방문에 무늬 새김 넣을 들국화를 따오래서 나선 길이었다. 며칠 전, 종이를 만드는 사람이 울 너머의 닥나무를 베어가면서 창호지 한 다발을 주고 가더니 엄마는 아까운 늦가을 볕 흘려버리지 않으려고 급하게 풀 쑤어 문 바를 작정했을 것이다.
휘- 둘러보니 다른 꽃을 다 지운 까깨등 쪽만 강냉이 튀밥을 쏟은 듯 들국화 천지다. 난 급한 마음에 모양이나 때깔 고를 것 없이 손닿아 잡히는 대로 뚝뚝 뜯었다. 고사리 양손에 꽃 한줌이 금방 찼다.
한나절 만에 집안이 온통 환하다. 세상이 달라 보일 정도다. 비바람 들이치고 파리똥에 찌들어 얼쑹덜쑹하던 방문을 새로 발랐기 때문이다. 풍풍 뚫린 구멍으로 들어오는 바람 탓에 새벽이면 코끝이 시리던 요즈음이었다.
문을 새로 발라서 집이야 깨끗해진 대신 우린 동네 사람들 눈 밖으로 돌려날지 모른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닥나무는 마을공동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집터이긴 해도 울타리 바깥의 노는 땅에 자라는 만큼 아무나 베어다 껍질을 벗겨서 아이들은 팽이채로, 어른들은 쇠고삐나 지게 밧줄을 꼬았고, 여자들이 다래끼 끈을 매는데도 두루 잘 쓰였다.
그러던 작년 봄,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사람이 찾아왔다. 대대로 한지를 떠왔는데 닥나무를 베어가는 대신 문창호지를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아까운 땅 차지나 하던 허드레나무를 닥종이와 바꿔간다는데 누군들 싫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
가을이 되자 남자는 어김없이 찾아와, 바람 못 견디고 쓰러진 휘추리 하나 남김없이 밑동 바짝 베어 묶고 구두약속한대로 창호지 한 다발을 주고 갔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꼭 쓸 만큼만, 우리 허락을 미리 받고서야 얻어가게 됐으며, 더군다나 올핸 곁가지 하나라도 더 없어지기 전에 챙기느라 된서리 오자마자 낫질해가 버렸으니 이웃은 물론이고 우리도 닥나무 끄나풀 헤프게 쓰긴 다 틀렸다.
안방, 웃방과 마루 건너의 골방까지도 우린 연달아 이태를 새 창호지로 문 발랐다. 하얀 방문이 너무 깨끗해서 남의 집에 잘못 들어선 것 같다. 다른 집들에 비해 잔뜩 웅크린 듯 우중충했었는데.
《새들도 추운 계절》
칼바람 매서운 한겨울, 밤이 깊어지자 샘머리집 태호 형이 작은 소리로 부른다. 이불속에서 기다리던 나는 어른들 몰래 문을 열고 나왔다. 오늘밤에 우리 집의 참새들을 잡아서 같이 구워먹기로 약속했었다. 형은 이미 낮에 둘러보며 새들 굴을 다 확인해 두었다. 처마 밑에 지려놓은 똥이 있으면 새가 산다는 증거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워둔 데란다.
산 밑에 바짝 붙여 지은 우리 집엔 유난히 새가 많이 산다. 봄부터 가을까지 산과 들에서 살던 여러 종류의 새들이 날이 추우면 여기로 모여든다. 난 남포유리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들고 뒤를 따랐다. 그리고 태호 손짓에 따라 멈추어 섰다.
낮에 미리 받쳐 놓은 사다리에 올라간 형이 살금살금 손을 뻗어 초가지붕 이엉 틈새 구멍 안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짹짹거리는 새를 움켜잡은 형은 사다리에서 내려오기 위해 내 손에다 새를 넘겼고 난 행여라도 놓칠세라 꽉 움켜쥐었다.
털이 따뜻한 새가 꼼지락거릴 때마다 겁에 질린 맥박이 손안 가득 느껴진다. 왠지 모를 두려움이 밀려와 엉겁결에 손을 폈다. 새는 포록거리며 어둠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형은 다음 굴로 가서 또 한 마리를 잡아 넘겨줬지만 이번에도 난 거짓말처럼 홀랑 날리고 말았다. 이미 소동을 눈치 챈 다른 새들은 여기서 저기서 날아가고... 별명이 참새포수인 태호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에이 망했다. 겨우 두 마리가 뭐나!"
투덜거리며 손을 내미는 형. 그러나 난 빈손이었다.
"새 어쨌니?"
"놓쳐버렸어."
"이런 멍청이, 잡아준 것도 간수 못해. 너 일부러 놔줬지?"
아니라고 부인을 해도 형은 믿질 않았다. 오히려 나 혼자 다 가지려고 감췄나 의심하여 주머니를 뒤지기까지 했다.
"에라, 무녀리자식아. 다음부터 너랑 같이 잡나봐라."
잔뜩 화가 난 태호 형이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방에 들어와 누웠어도 쉽게 잠이 오질 않는다. 파닥거리던 작은 새의 숨결과 고동이 아직도 손안 가득 남아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나는 뒤꼍으로 갔다. 휑한 구멍이 쳐다보인다. 이제 여긴 한동안 새가 들지 않을 거였다. 아니, 영원히 떠나 가버렸을지도 모른다. 북향인데다 한해씩 건너뛰며 지붕을 잇는 바람에 우리 지붕은 골골이 패이고 거기서 흐르는 낙수 양이 넉넉하니 하루만 둬도 손아귀에 꽉 찰 만큼 굵게 자란다.
더구나 엄마는 고드름을 따면 아기 낳을 시기 가까운 엄마 젖이 마른다며 건드리질 못하게 해서 크고 싶은 대로 길어진다. 사람 드나들기에 걸리적거리는 데도 그냥 놔 둔 고드름이 장대발 키를 서로 다투며 촘촘히 자라고 있다.
지붕 위에 쌓인 눈이 고드름 되었다가 녹아내리기를 몇 번씩 되풀이하는 동안 날마다 살펴보았지만 우리 처마 밑엔 두 번 다시 새똥이 떨어지지 않았고, 산골의 긴 겨울이 더욱 지루하게 지나갔다.
《금옥이 누나》
큰 소리로 부르면 알아듣고 대답할 만큼의 거리를 두고 금옥이 누나네 집이 있다. 행길 쪽에서 보자면 우리 집 위에 금옥이네가 살았으므로 싫든 좋든 꼭 우리 마당을 지나다녀야 한다.
금옥이와 난 두 살 차이, 하지만 나이 이상으로 누난 나를 챙겨준다. 집에서 학교까진 시오리길이다. 어른들이 그렇다니까 믿어야지 걸음으로라도 재본 적은 없다.
금옥이는 늘 햇귀 돋기도 전에 일찍 밥을 먹고 우리 집에 와 기다리다 내 손을 끌어서 학교엘 간다. 영국이가 나와 같은 반이지만 갠 면사무소에 다니는 삼촌 자전거 뒤에 편히 실려 다닌다.
마을 앞 굽은재를 넘으면 제법 마을 꼴을 갖춘 널찍한 동네가 나오는데 거기 사는 애들은 늘 우리를 산골 놈들 취급해 텃세부리기 일쑤다. 심지어 학교에 들어가지도 않은 꼬맹이들까지 큰애들 뒤를 믿고, 겁 없는 사마귀처럼 앞길을 막아서며 주먹을 둘러메기까지 했다. 그나마 누나가 나의 방패막이가 되긴 했지만 몸도 약하고 고라니처럼 순해빠져서 힘이 별게 아니었다.
그 마을을 지나고서 개울을 건너야 가장 반듯한 건물인 우리학교가 있다. 늦가을에 양쪽마을 사람들이 모여 나무를 베어다가 섶다리를 놓긴 하나 큰물이 져서 떠내려 가버리면 다시 놓는 가을까지 맨발벗고 건너야 한다. 여름 장마철마다 강 건너 쪽 사는 애들은 당연히 임시휴교다.
누나가 나를 더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건, 그런 형편에도 내 성적이 뛰어나서다. 다섯 마을 아이들로는 교실이 안 차서 창밖의 참새들까지 모두 불러들여야 한 반을 꾸릴망정, 세상 막바지나 다름없는 골짝 출신이 큰 동네 애들 제치고 공부 잘하는 게 누난 부럽고 뿌듯했을 것이다.
그날 첫 시간이 국어였고 담임선생님은 이어읽기를 시키셨다. 앞사람부터 한 문단씩 읽어나가다가 다음 사람이 받아 읽는 것인데 새로 반을 맡은 선생님이 아이들 각자의 수준을 알아보려는 듯했다. 차례가 됐는데도 멍하니 선 채 성에꽃무늬 진 창밖을 바라보는 내 앞으로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수업시간에 딴전을 피우고 있으니까 읽을 데를 모르잖아!"
까까머리 위에 톡톡 부딪쳐 오는 막대기는 아픔보다 모멸감부터 얼굴가득 끼얹었다. 그러나 책을 뺏어 뒤적이던 선생님도 옳게 찾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재작년에 금옥이, 작년엔 옆 마을 민우를 거쳐 내 손에 넘어올 때부터 책 앞뒤의 여러 장이 떨어져나가고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책을 이렇게 다 찢으면 어떡해. 옆 사람 걸로 읽어봐."
다시 머리통에 느껴지는 막대기, 하얗고 가녀린 손끝으로 내가 읽어야할 부분의 단어까지 정확히 짚어주는데도 불구하고 난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밀려오는 서글픔 때문에 눈물이 솟아 글씨가 제대로 보이질 않는데다가 애써 읽으려 해도 목소리마저 나오질 않는 거였다.
"세상에, 3학년이 되도록 글씰 모르는 녀석이 배울 생각도 않고... 남부끄럽지도 않니?"
아까보다 더 야무진데다 감정까지 덧들인 막대기가 맨머리를 두드리고 책 읽을 순서는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대신 수업시간 내내 난 교실 귀퉁이에 꿇어앉아 벌을 받아야 했다. 빨리 온전한 페이지까지 나가야 한다. 그래야 끝없이 떨어져버린 위신을 되찾을 수 있다.
얼마 뒤, 일기장 검사를 통해 내막을 알게 된 선생님은 조용히 불러 위로 겸, 사과를 하셨다. 다른 과목도 빠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특히 국어는 따라올 사람이 없을 만큼 앞서나갔다.
말짱하던 하늘에서 채찍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제법 많은 소나기. 공부 다 끝났지만 나는 빗줄기가 가늘어지길 기다릴 속셈이었다. 그런데 복도에 나오자 금옥이가 기다리고 있다. 학교근처에 사는 친구한테서 살이 여러 개 부러진 비닐우산을 빌려왔지만 함께 쓰나마나, 옷 적시며 개울까지 와보니 철 이른 큰 비에 돌다리가 잠겨버렸는지 떠내려갔는지 사라지고 없다.
비가 계속 쏟아져서 황토 강물이 퉁퉁 불어 오르므로 더 늦기 전에 건너야한다. 누나 손에 끌려 물에 들어서긴 했지만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어질어질할 정도로 무서웠다.
둑으로 물러나 잠시 생각한 누나가 허리에 매고 있던 책보따리를 풀어 나한테 넘기고 등을 들이댔다. 미심쩍긴 했지만 난 작은 등에 업혔다. 사납게 흐르는 물살. 바들바들 휘청거리면서도 누나는 겨우겨우 개울을 건넜다. 따뜻한 누나 등에서 내려온 다음에야 난 움찔 놀랐다. 금옥의 발등 살갗이 찢어지고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거였다. 빗물에 씻겨도 자꾸 배어나는 피.
난 몰랐다. 거칠게 흐르는 황토물 밑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뿌리 뽑힌 나무며 돌들이 마구 굴러 내린다는 것을. 그것들에 발을 다쳤지만 누나는 내색하지 않은 채 나를 무사히 건네 놓은 것이다. 빗발이 약해지고 있었다. 절룩거리며 앞서 걷는 누나의 어깨며 등에서 김이 오른다. 빗물 젖은 몸에 나일론 옷이 착 달라붙어 더 야위어 보인다.
남한테 고맙다는 감정을 처음 느꼈다. 그 고마움을 평생 간직하겠다고 다짐했다.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보호해주려는 누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린 선녀일 거였다.
《내 학용품 보물창고》
우리 집과 종숙이네 집의 경계인 울타리에 조팝나무 꽃이 가득 피었다. 내일 환경미화 당번이라서 교실 꽃병에다 꽂아놓으려고 조팝꽃을 꺾으러가던 나는 너무 놀라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덤불 밑에서 뒤뚱대며 달아나는 까만 암탉 때문이다. 그리고 우묵하게 패인 땅바닥에 달걀 네 개를 소복이 낳아놓은 게 보였다.
다른 집 닭이 여기 와서 낳았을 터, 제 둥우리를 두고 왜 여기다 낳았는지 모르지만 가슴이 마구 뛴다. 종숙이네 닭일 것 같은데 여기에다 알을 숨겨놓은 줄 모르고 있을 거다. 걔넨 넉넉한 농토는 물론 소와 돼지, 토종닭이 여러 마리여서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부자다.
'종숙이한테 알려주자. 그럼 고마워서 한두 개 줄지도 몰라. 아냐, 이게 꼭 걔네 거라고 할 순 없지. 매일 하나씩 더 나을 테니 가져가도 표시 안 나잖아.'
갈등 속에서 나는 그 알을 챙길 명분을 찾기 시작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사람이라곤 없다. 하나만 갖기로 작정하고 따뜻한 알을 살그머니 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몇 걸음 옮기던 나는 끝내 발길을 돌려 알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말았다. 여우같은 종숙이가 숨어서 훔쳐보고 있다가 내일 학교에 가서 소문낼 것 같아서다. 방으로 들어오긴 했으나 네 개의 달걀만 눈앞에 어른거릴 뿐. 숙제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교내 백일장에다 써낼 글짓기를 해야 되는데 원고지는 커녕, 연필이 없다. 오래 전에 산 연필은 손에 쥘 수가 없을 만큼 작아져서 붓뚜껑에다 끼워 썼는데 그나마도 어제 잃어버리고 왔다. 사달라는 말을 어렵게 꺼내자 칠칠맞게 연필 잃어버린 걸 되레 나무라는 엄마가 야속하지만 귀 떨어진 동전 하나 나올 데라곤 없으니 엄마 마음도 답답할 거다.
어두워지길 기다려 다시 울타리로 갔다. 조심조심 알이 있을 델 더듬었다. 포근한 닭털이 만져졌다. 밤인데도 암탉은 알을 꼭 품고 있었다. 억센 부리로 내 손등을 콕콕 찍으며 버티는 어미를 밀쳐내고 달걀 네 개를 몽땅 뺏어 와버렸다. 조심스레 가져온 알을 헛간의 항아리 안에 숨겨놓았다.
이튿날, 평소보다 일찍 서두른 나는 남들보다 앞서 학교로 향했다. 학교 앞 가게에서 돈 대신 달걀도 받아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받아든 돈으로 연필 한 자루와 원고지 석장부터 사고도 돈이 조금 남았다.
많은 물건들 중에서 가장 먼저 내 눈길을 유혹하며 걸린 풍선뽑기판. 남들이 못 뽑고 남은 커다란 풍선 몇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나를 꼬드긴다. 종이판에 동그란 표시가 있고 그걸 뜯으면 뒤에 적힌 숫자가 적혀 있는데 그 해당번호 풍선을 갖는 거다. 뽑을 번호는 딱 하나 남았으므로 크고 좋은 저 풍선들 중 하나는 분명 내차지였다.
동전을 건네준 나는 당당하게 숫자판을 떼어냈다. 하지만 가게 주인은 한쪽 귀퉁이에 보일 듯, 말 듯 달라붙은 초라한 풍선을 내주는 게 아니가. 순간 멍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난 무엇에 홀린 것처럼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주인이 뒤의 번호를 들춰본 뒤 좋은 번호는 미리 뜯어냈다는 것을. 다른 아이들은 그런 수법을 미리 다 알고 속질 않았으나 어수룩한 내가 마지막으로 걸려들고 만 거다. 그렇게 남은 큰 풍선들은 몇 배의 웃돈을 붙여서 팔아먹는다.
교실로 들어가 밀린 글짓기 숙제를 시작했다. 새 연필과 원고지 덕분인지 글이 잘 써졌고 검사를 하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책보를 풀어놓자마자 종숙이 엄마가 쫓아왔다. 울 엄마와 종숙엄마 사이에 험악한 말싸움이 오갔고 나는 곧 싸움판에 불려 나갔다.
"너 종숙이네 달걀 훔쳐왔어?"
엄만 '아니오.' 란 당당한 대답이 나오기를 철석같이 믿었을 거다. 엄마의 확신에 눌린 내가 얼버무리며 부인을 했지만 이미 증거를 잡고 찾아온 종숙엄마의 심문을 빠져나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엄마 눈에서 노여움의 불길이 새파랗게 피어났다.
"머리 부스럼딱지도 안 벗은 눔 간댕이가 저렇게 커서 어쩐대. 욕심나면 몇 개나 가져갈 일이지 여남은 개를 몽땅...."
네 개를 가져온 죄는 열개나 훔친 도둑질로 부풀어졌다. 성질 못된 수탉을 피해 알자리를 옮긴지가 열흘이 넘었다는 계산을 들이댔다. 엄마한테 손목을 틀어 잡힌 나는 싸리빗자루로 엉덩이며 등짝을 마구 맞았다.
"웬만큼 해둬. 애들이 몰라서 한 짓인데. 크면서 차차 손버릇 고와지겠지 뭐."
팔짱낀 채 옆을 지키고 선 종숙엄마가 이런 소릴 지껄이지만 않아도 매질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옆에는 종숙이가 당당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로 엄마는 이웃동네까지 다니며 수탉 있는 집들을 찾아가서 유정란을 모아다가 종숙이네를 주었고 세이레, 21일이 지나 깜장, 노랑 갈색 등 여러 색깔이 섞인 병아리 여남은 마리를 깠다. 종숙이네 닭과 나는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어 집 근처에 얼씬거릴 때마다 멀리 쫓아버렸다. 그 뒤로 난 달걀을 먹지 못한다. 삼키기만 하면 모조리 토하고 만다.
한동안 지난 어느 날, 교실에 들어오신 교장선생님께서 담임선생님이 출장을 가셨으니 옆 반에 가서 합반수업을 하라고 시키셨다. 책과 학용품을 챙겨 옆 교실로 갔으나 책걸상 숫자가 모자라니 우리 반은 바닥에 앉아야 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서인지 교실은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져갔다. 그 반 여선생님의 호령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덩달아 산만해진 나는 지난번에 달걀을 주고 산 연필로 장난을 시작했다. 나무 널판을 깐 마룻바닥엔 옹이 빠진 구멍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그 구멍에 연필 끝을 잡고 넣었다, 뺐다가, 빙글빙글 돌리는 재미에 정신이 팔렸다.
그러다 연필을 놓치는 바람에 구멍 속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필기도구라곤 그 몽당연필뿐인데 잃어버렸으니 큰일이다. 다행히 연필을 쓸 일 없이 잘 지나갔다.
첫 시간이 끝났다는 종소리가 들렸고 우르르 몰려나가는 아이들에 섞여 나도 밖으로 나왔다. 살펴보니 건물 밑에 통풍구가 드문드문 있다. 구멍 속으로 기어들었다. 워낙 좁아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들어갔지만 어두워 앞이 보이질 않는다. 머리 위로는 마룻바닥에 박은 대못 끝이 삐죽 삐죽 나와 있고 땅 바닥엔 오랫동안 쌓인 먼지가 수북했다.
내가 앉았던 자리쯤을 짐작해 기어가서 바닥을 더듬었다. 손끝에 무언가 만져졌다. 연필이다. 그러나 내께 아니다. 칼로 깎을 때마다 길이가 줄어드는 만큼 마음도 졸였기 때문에 금방 알 수가 있다. 다시 손더듬질 시작했다. 길고 짧은 여러 자루의 연필과 지우개, 칼, 거기에다 동전 몇 개도 주웠다. 교실바닥 마룻장 틈새로 빠진 것들이 분명하다. 주머니가 곧 불룩해졌다.
머리에 거미줄을 가득 걸친 채 밖으로 기어 나오자 이미 시작종이 울려 모두들 교실에 들어간 뒤였다. 작두우물로 달려가 마중물을 붓고 물을 품어 올려서 옷과 몸에 묻은 먼지를 씻어냈다.
교실에 들어서니, 깨끗이 닦는다고 했음에도 얼룩이가 된 내 모습을 보고 선생님은 물론 두 반 아이들이 모두 웃어댔다. 비록 놀림감이 되었지만 주머니에 가득 든, 한동안 쓸 학용품을 생각하면 최고로 마음 뿌듯하였다.
그 이후부터 나만 아는 학용품 보물창고가 생겼다. 학용품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 교실은 물론이고 학교건물 마루 밑을 기어 다니면 다 해결되었다.
《가뭄의 끝》
오늘도 비 올 날씨가 아니다. 들머리 '개늪둠벙'에 고였던 물이 오랜 가뭄에 줄어서 가운데 쪽에만 조금 남았고 온갖 물살이들이 거기 몰려 우글거린다. 봄 내내 넘쳐나던 올챙이들은 상급학교로 진학하듯 어디론가 떠나버린 뒤여서 다행이다.
살아보겠다고 나대는 것들 중엔 미꾸라지도 여러 마리 섞여있었다. 같이 버티던 장구애비며 물방개는 날개를 다 말려서 멀리 날아갔다. 내 뒤를 따라온 검둥이가 목이 마르다는 듯 혓바닥 깔짝거리며 핥아댄다. 아까운 물이 줄어든다는 생각에 개를 쫓아냈다. 이제껏 다정하던 주인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검둥이가 아쉽다는 듯 물러난다.
땅을 펄펄 달구는 땡볕. 난 하늘을 원망했다. 머지않아 이 물은 다 마르고 진흙바닥이 드러날 것이다. 가득하던 개구리밥과 마름풀이 땅에 붙은 채 말라버릴 거다.
난 샘으로 달려가 대야로 물을 퍼다 웅덩이에 부었다. 성에 안차 다시 떠서 돌아오다가 푸다닥 날아가는 까마귀를 보았다. 이미 웅덩이의 물살이들 절반 이상을 잡아먹고 난 뒤였다. 발자국을 어지럽게 남긴 까마귀는 근처 뽕나무에 앉아 나더러 어서 떠나가라고 까옥까옥 독촉하였다.
난 남은 것들을 바가지에 건져 담았다. 그리고 물이 확 줄어든 물떠러지 폭포로 향했다. 웬만한 물줄기는 다 말라버려서 거길 가야 넉넉한 물을 만날 수 있다. 웅덩이에서만 살던 것들이 여기에 적응할지는 모르나 그래도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물에 쏟아놓으니 녀석들은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이리저리 숨을 곳을 찾아간다. 얕아진 폭포 한가운데 있는 큼직한 바위그늘을 따라 한가로이 놀던 버들치들이 내 그림자 때문에 놀랐는지 바위 밑으로 사라졌다.
쪼그려 앉은 나는 물속을 들여다본다. 마치 넓은 유리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맑다. 파란 하늘이 물에 비치고 있다. 문득 기다란 장대에 더러운 걸레를 매달아 얼룩구름을 만들고 싶다. 지금은 저 깨끗한 하늘과 맑은 물이 아주 싫다. 구름이 많이 끼어야 비가 올 테니까.
대왕고기를 찾는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눈에 띄질 않는다. 낯익은 사람이라 안심이 되는지 작은 고기들부터 다시 모습을 보인 다음에야 열목어가 바위굴 밖으로 몸을 드러냈다. 그새 더 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의젓한 몸짓은 그대로였다.
저 열목어는 이 폭포수에서 젤 크다.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여기에 살고 있었으니 나이도 비슷할 것이다. 녀석은 왕답게 당당한 모습으로 바위둘레를 빙빙 돌았다. 등에 있는 줄무늬와 검은 점들, 동그랗고 발그레한 눈, 입을 뻐끔거릴 때마다 함께 들먹여지는 아가미, 뽐내듯 흔드는 지느러미랑 꼬리. 한참이나 헤엄을 즐기던 열목어는 싫증이 나는지 다시 바위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 바지를 걷고 물에 들어갔다. 그리고 방금 전에 대왕고기가 숨은 바위 밑을 더듬었다. 굴이 있다. 그러나 좁고 깊어서 손이 들어가질 않는다. 바위를 넘겨보려고 온힘을 다 썼지만 양팔로도 단 안지 못할 만큼 큰 바위라서 꿈쩍하지 않았다. 아, 마음이 놓인다.
이 바위는 폭포에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의 집이고 작은 대궐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바위 밑이 늘 궁금하다. 굴속은 들여다 볼 수도, 손을 디밀어 만져볼 수도 없을뿐더러, 큰 바위를 내 힘으로 뒤집기는 더욱 불가능하다. 빨리 어른으로 자라서 저 바위를 휙 넘겨버리고 물고기들의 왕국을 속 시원하게 보게 될 날이 왔으면...
난 물을 한 대야 가득 떠서 부지런히 개늪둠벙으로 갔다. 거기 남아있는 것들을 살리는 길이라곤 이 방법뿐이다. 웅덩이 바닥에 구멍이 나서 새는지 아무리 퍼다 부어도 그대로이고, 오가는 거리가 꽤 멀어서 곧 지치고 말았다.
밤, 무언가 장독대를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문을 여니 거짓말처럼 소나기가 퍼붓고 있다. 얼마나 기다리던 비인가. 반가우면서도 왜 이제야 오시는지 야속한 생각이 더 크다.
곧 맹꽁이 소리가 들린다. 개늪둠벙이 떠나가도록 시끄럽다. 아까는 안보이던 놈들이 어디서 나타났을까. 눈물이 찔끔 흘렀다. 안도감 속에 그 소릴 들으며 한여름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부디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어야 할 텐데.
《청보리 여물 무렵》
늦봄이거나 초여름, 외할머니께서 다니러 오셨다. 입 하나 덜려고 일찍, 그것도 몸 성치 않은 총각한테 출가시킨 막내딸이 눈에 밟혀 지팡이 의지해 먼 길 나섰을 테지만, 궁색한 형편에 마음 불편한지 바로 돌아가려는 할머니를 엄마가 붙잡았다.
쌀독이 비어서 차려낼 것이 마땅치 않은 엄마가 급히 사라지는가 싶더니 자줏빛과 하얀색 꽃이 절반씩 섞인 감자밭에서 돌아왔다. 중간 크기의 감자들이 양푼 절반가량 담겼다. 며칠 간격으로 밑뿌리를 뒤져서 먼저 굵은 걸 캐다 먹고 두럭 수북이 흙을 덮어준들 마음만큼 빨리 크질 않는다.
엄마가 툇마루 끝에 앉아 감자껍질을 벗기는 동안, 지체장애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바우배기밭으로 갔다. 비탈뙈기 중간으로 들어간 아버지가 보리를 베면 난 짚으로 묶는다. 어떤 곡식이든 가장자리보다는 가운데에서 자란 놈이 더 실한 이유도 있겠지만 흉 꺼리를 남들 눈에 보이기 싫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먼저 여문 이삭만 골라 베어온 보리를 풋바심해 털기 시작한다. 도리깨질 대신 홀태로 훑는 아버지의 땀투성이 얼굴은 온통 거친 가시랭이로 뒤덮여간다. 햇볕 쬐일 짬이 없어서 가마솥에 불을 지펴 급하게 말린 겉보리를 절구 확에 쏟아 붓는다. 엄마가 열심히 절구질을 하지만 금세 힘이 달리고 절굿공이 오르내리는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동생이랑 내가 교대로 방아깨비 팔다리 힘을 거들어보나 별 도움 되진 못하고... 보다 못한 할머니가 그나마 근력을 보태자 거칠던 겉보리가 보리쌀로 바뀌어간다. 겨우 찧은 햇보리를 키질하여 등겨를 까부른다. 애만 썼지 다 여물지 않아 소출이랍시고 겨우 두어 됫박의 알곡.
엄마가 불쏘시개에다 성냥을 그어댄다. 아궁이 가득 불꽃이 피어난다. 따다다다~탁... 바짝 마른 솔가리가 송진내를 뿜으면서 타고 장작에 옮겨 붙은 불길이 시커먼 이맛돌 밖으로 널름널름 넘쳐난다.
맏이인 나한테 맡겨진 아궁이. 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연기 쐬어가며 부지깽이질 하는 건 고역이다. 틈나는 대로 행주질하여 윤기 반지르르한 무쇠 솥뚜껑 틈새에선 물방울이 눈물 마냥 흘러내리다가 곧 한숨 같은 김이 푸욱푸욱 내뿜어진다.
얼핏 내다보니 엄만 텃밭에 가있다. 부엌에서 몇 걸음 발치에 있는 텃밭은 푸성귀며 양념거리 공급 터다. 열무, 고추, 가지, 오이... 파도 대파, 실파, 쪽파, 고랑마다 종류별로 자라는 것들을 끼니때마다 필요한 만큼 솎아다가 찬거리로 쓴다.
엄만 냉국부터 만든다. 봉숭아 몇 포기를 화초로 심어놓은 장독대에 가서 간장을 떠다가 잘게 채를 썬 오이와 실파를 넣고 찬물을 부어 맛을 본다. 참기름 병마개를 열어 조금 따르고는 병 주둥이에 흐른 기름방울을 날름 혀 내밀어 핥는 엄마, 그 모습은 차라리 안 보는 게 좋았을걸. 급하게 버무린 겉절이는 다시 밭으로 기어가고야 말겠다는 듯 숨이 죽질 않는다.
꽤 늦었지만 제법 갖추어진 두리반 점심상 앞에 모두 둘러앉았다. 잔정 많은 외할머니가 장마철의 백로 늦새끼처럼 야윈 손주들한테 뜨거운 감자 하나씩을 후후 불어 들려주고 목이 메일까봐 냉국도 떠먹여준다. 그리고 나서야 워낙 시장했었는지 감자를 절반 갈라 맛있게 드신다. 뒤주 밑이 긁히면 밥맛이 더 난다더니 공연히 생긴 말은 아니다. 외할머니 덕분에 우린 봄 감자 얹은 햇보리밥을 남보다 일찍, 배불리 먹었다.
하룻밤 묵어가라고 붙들었지만 끼니사정을 눈치 챈 할머니가 해떨어지기 전에 가겠다며 서둘러 집을 나서고 '잘 살펴가세유.' 빈손 잡아주었을 뿐, 여비 한 푼 못 쥐어준 엄만 할머니가 동구 밖으로 사라진 뒤에야 부엌문짝을 짚은 채 올 풀어진 행주치마폭으로 눈물을 훔쳤다. 할머니가 다녀가신 이틀 뒤, 외삼촌이 보리쌀 몇 말을 지고 오셨다.
그 무렵에 막내도 잃었다. 삼칠일 산후몸조리는 고사하고 이튿날부터 진자리 걷고 일어나 찬물에 손 담근 탓에 어머닌 줄곧 잔병을 앓았고, 아기 역시 태어날 때부터 내내 실하질 못했다. 제 스스로 몸 한번 뒤집어본 적이 없었다.
첫돌이 갓 지나고 웅얼웅얼 토막말을 배울 시기, 매서운 겨울을 병치레로 넘긴 동생은 만물이 생동하는 봄을 맞았어도 낫기는커녕 더 시들어갔다. 숨 탄 것의 몸이 저토록 깡마를 수 있다는 걸 난 어린 나이에 실제로 보았다.
지금 생각하니 아기의 병은 폐렴 비슷했지 싶은데 떠돌이 약장수한테 보리쌀 퍼주고 산 알약 몇 봉지로 고치려 한 건 그놈의 원수 같은 가난 때문이었으리. 가난은 귀신보다도 차라리 모질고 독했다. 아니 선한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다.
엄마가 가슴쥐엄해서 훑어 짜낸 젖에 가루약 뭉갠 숟갈을 들이밀면 두어 개 난 앞니 옹다물며 투레질로 쏟아버리곤 하여 볼기가 붉도록 맞고 나서야 제풀에 지친 듯 꼴깍꼴깍 목구멍으로 넘기며 아기는 시간과의 겨룸하듯 시들어갔다.
동생이 우리 곁에서 자꾸만 멀어져간다는 걸 비록 열두 살의 나이지만 난 예감하고 있었다. 본능처럼 느낌이 왔다. 이미 잃기로 작심한 것으로부터 정을 떼는 엄마가, 아버지가, 모든 어른들이 원망스러웠다. 남은 자식들 목숨들이나 잘 챙기겠다는 욕심인가. 아니면 맡겨진 부모 책무 다하기가 그토록 힘에 버겁단 말인가.
그렇게 밤새우다시피 하길 여러 날. 한밤중이었다. 잠결에 난 엄마의 흐느낌을 들었다. 아기가 실낱 끝만큼 남았던 숨을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어머닌 우릴 모두 깨워 웃방으로 쫓았고 제 베개 부피도 되질 않게 살집 없는 아기를 입었던 옷 그대로, 깨끗한 소창 기저귀에 둘둘 말아서 문 밖으로 내놓았다.
"올핸 동남쪽이 안 막혔대요."
온전치 않은 몸을 추슬러 밖으로 나가는 아버지 뒤에다 대고 엄마가 이미 마음 각오하고 있었던 듯 목쉰 소리를 내셨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식의 마지막 묻힐 방향이나 정해주는 것이었다.
짧게 살아온 동안 가장 길고 심란한 밤을 보낸 새벽, 잠이고 뭐고 다 틀린 채, 오줌 누러 마당으로 나온 난 그만 눈을 감기 전까지는 절대 보지 말았어야할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골빼기산자락에서 삽을 메고 내려오는 아버지 모습이 눈에 띈 것이다. 산기슭을 휘감으며 안개가 밀려가고 메밀밭 사이를 지름길 삼아 내려온 아버지의 이슬 젖은 바짓가랑이엔 메밀꽃들이 잔뜩 묻어있었다.
난 사립문 뒤에 몸을 숨긴 채 아버지를 다 지켜보았지만 산발치 어딘가에 동생이 묻힌 사실을 아무에게 말하지 못했다. 영원히 밝혀지면 안 될 비밀 같았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겨우 제 피붙이들 얼굴도 못 익힌 채 간 아이한테 마지막으로 깨끗한 옷도 못 입혀 보낸 죄책 때문인지 어머닌 며칠이나 그 시간 되면 목울음을 삭였다.
다음해 그맘때, 한살 더 먹었대서인지 그렇게 동생이 보고 싶을 수가 없었다. 이승이랍시고 태어났다가 제 핏줄들 얼굴도 못 익히고 떠난 우리 막내, 마지막 떠나면서도 변변한 입성 하나 못 갖춘 채 슬프고 한 많은 길을 떠난 아이. 아버지를 제외한 식구 누구한테도 묻힌 자리조차 알려지지 않는 불쌍한 동생.
작년에 이어 싸리꽃 핀 산자락을 찾아갔다. 하지만, 곧바로 올라와서 확인해 두어야 했을 것을... 벌써 일 년이 흘렀대서 동생 묻힌 자리를 알 수는 없었다. 누군가 몰래 만든 흙더미가 보였지만 동생이 묻혀있을 곳은 끝내 어림되지 않았다. 가족들 대신 애총비알을 지켜온 꽃무더기들이 어린 넋을 위로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난 산꽃들에게 동생을 맡겨두고 훌훌 내려왔다. 아버지처럼 메밀밭 중간을 타고 오질 않았다. 훤히 먼동이 터오자 사람들 눈에 안 띄려고 밭 중간 지름길을 절룩거리며 서둘러 내려온 아버지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 뒤 난 그쪽 산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막내를 버리고 나서 더 달라진 엄만 자식들의 짧은 배꼬리를 채워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4남매라 만만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원두막 정경》
여름 방학이다. 방학이래서가 아니라 중학교 입학한 금옥이 누나는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고 쉰다. 남들한테 드러낼 수 없는 병, 몸이 창백하고 자꾸 마르며 늘 바튼 기침을 달고 산다.
그럼에도 누나 집에서는 딸 병을 고치는데 별다른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 같은 병으로 골골거리다가 일찍 세상 떠난 아버지가 그나마 아들들보다 딸한테 물려놓은 게 다행이란 생각일까. 그 어머니나 오빠들이 틈틈이 잡아들인 지네를 말렸다가 가루 내어 먹이는 눈치였지만 누나는 그걸 죽기보다 싫다고 안 먹으려 해서 허구한 날 온갖 악다구니가 울타리를 넘어왔다.
엄마는 그런 금옥이와 가까이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못된 병 옮으면 큰일이라는 거였다. 고칠 수도 없는 평생 고질병이라 했다. 누나가 우리 집에 드나드는 걸 내놓고 꺼렸고, 음식을 나눠먹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누나는 그렇게 점점 외톨이가 되어갔다. 읍내에 다방을 차려 나간 큰 오라비에 이어 작은 오빠도 군대에 가서 홀어머니와 둘이 지내는 금옥이. 하지만 나로서야 이제껏 친동생 이상으로 잘 대해주던 누나를 어떻게 멀리 하는가. 그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럴수록 난 누나한테 점점 정이 갔다.
난 엄마를 찾으려고 '범골'로 가는 중이었다. 그 중간에 금옥이네 원두막이 있다. 산날개에 가려 집에선 잘 보이질 않는데 누나는 혼자 지붕 낮은 원두막을 지키고 있었다.
"용아, 어디 가?"
누나는 언제나 웃음이 고왔다. 말보다 웃음이 늘 먼저였다. 난 주위부터 살폈다. 남한테든, 식구들 눈에든 들킬까 해서다.
"엄마 찾으러."
"땀 좀 식히고 가라 얘. 날이 워낙 덥다."
난 앙상한 사다리를 밟고 원두막 위로 올라갔다. 밭으로 들어간 누나가 큰 참외 하나를 따와서는 칼로 깎아 내게 건네주었다. 단내가 났다. 그 향기가 묘약처럼 더 침을 돋우었다. 쓴맛 가시지 않은 꼭지까지 알뜰히 씹어 먹고 나자 누나가 말했다.
"엄마 범골 밭에 가셨니?"
난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 났다. 거기 호랑이 나올 텐데."
"무슨 호랑이?"
"너 왜 거기가 범골인지 모르지? 옛날에... 갓 시집온 새색시가 말리는 시어머니 몰래 거기로 곤드레나물을 뜯으러 갔대. 그러다 벽장바우 밑에 웅크리고 있던 호랑이한테 물려죽었지. 호랑이가 혓바닥으로 싹싹 핥아 왼쪽 가르마를 타서는 머리만 바위 위에 달랑 올려놓았더란다. 마을사람들이 가서 보니까 그 머리랑 분홍저고리만 남았더래. 그걸 화장해주고 귀신이 못 빠져 나오도록 시루를 엎어놓았어. 그때부터 거기를 범골이라고 부르는 거란다. 어때. 무섭지? 어흥!"
무섭긴, 거기 가야 되는 나한테 무서움을 태우려는 장난이지만, 내겐 치켜 뜬 금옥이 큰 눈이 우스워 보일 뿐이다. 숱하게 듣고 자라 다 아는 전설인 걸. 그 호랑이가 밤마다 새댁귀신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문구멍으로 들여다본다는 얘기를 들은 날 밤엔 오금이 저려 바깥에도 나오질 못했었다.
땀이 들어가자 땡볕에 나가기 싫어지고, 마냥 앉아있자니 졸음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그대로 쓰러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껴든 햇발 견디지 못해 눈을 뜨자 누나도 곁에 잠들어 있었다. 참외 냄새는 아까보다 더 진하고 독했다. 좀 뒤에 난 그 냄새가 금옥이 누나 가슴에다 난다고 생각했다. 몰래 코를 바짝 대고 맡아보았다.
그랬다. 금옥이 누나 가슴은 잘 익은 참외였다. 있으나마나한 작은 꼭지가 앙증스러웠다. 언젠가 장마 물에 나를 업고 건너며 생긴 발등의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 문득 눈물이 솟았다. 불쌍한 금옥이 누나. 무슨 병을 지녔는지 모르나 핏기 없이 앙상한 누나는 늘 저렇게 홀로 잠들기 일쑤다. 까칠한 모습이 안쓰러워 난 슬그머니 원두막을 내려왔다.
《대목장날》
추석명절 준비를 위해 장보러 가시는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조상님 제사나 명절이 다가오면 맏이인 나를 꼭 데리고 가신다. 시오리 산굽이 길을 걸어서 장터에 가면 사탕 한 알이라도 입에 들어오니 마음이 설레지만, 걸을 때마다 뒤축 갈라진 고무신이 홀랑홀랑 벗겨져서 짜증이 난다.
지체장애로 걸음이 불편하여 많은 짐을 지지 못하는 아버지가 어린 나를 길동무 삼으려고 데려가는 건 아니다. 내 손엔 됫병이 들려 있다. 명절 앞뒤로 여러 날을 방은 물론 부엌과 마루에 불을 켜놔야 되고 우물길 오갈 때 발등 밝힐 남포까지 챙겨야 되니 석유기름을 넉넉히 준비해야 한다. 질긴 닥나무껍질로 엮은 그물망에 담긴 석윳병은 팔이 빠질 듯이 묵직하다.
여기부터는 소풍리가 아니라 가담리 땅이다. 그나마 읍내 가까워 여기까진 신작로가 닿았다. 앞쪽에서 뿌연 먼지 일으키며 지프차 한 대가 달려온다. 우린 길가 멀리 떨어졌다. 흙먼지 뒤집어쓰기도 싫지만 차를 비껴 보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차는 그냥 지나가질 않고 우리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두 명의 미군이 내려서더니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얘기를 지껄이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말만 들었지 외국 사람을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이쪽저쪽 방향을 바꿔가며 사진 여러 장을 찍은 다음 주머니에서 서양과자봉지를 건네주곤 손을 흔들며 갔다. 그나마 가장 깨끗한 옷매무새랍시고 차려서 나온 우리 부자였지만 그네들에겐 신기한 구경거리인가보다.
삼방갈림길에 이르자 곡식 중간수집상이 먹이를 노리는 사마귀처럼 기다리다가 다가온다. 아직 지나간 사람이 별로 없는지 빈 마대만 수북이 쌓였다.
"어이구- 처사둔 양반을 만나니 돌아가신 조상님보다 반갑소. 킁킁."
이쪽근방 다섯 장터를 돌며 얼굴 익히다 보니 되든 말든 아무 촌수나 갖다 붙이는데다 말끝마다 킁킁거리는 버릇이 있어 별명이 '킁킁이 거간꾼'이다. 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상봉이기에 무뚝뚝한 울 아버지.
"명색이 대목인데 이렇게 장꾼 구경 힘들어서야...킁킁."
이미 아버지 지게 위의 고추포대는 사내 손아귀에 낚였다. 산적두목 같은 외모, 세수도 안했는지 꾀죄죄한 얼굴의 구레나룻이 흡사 묵밭에 우거진 잡초 같다.
"고추구먼. 바짝 말렸수?"
"맏물만 따로 챙겨놨던 거라오. 값이 꽤 뛰었다던데?"
"킁킁. 먼저 장시세나 똑같애."
"농사철까지 먹을라고 애끼던 걸 들고 나온 거니 잘 쳐줘야 팔거래유."
"거참, 멧부엉이 같은 답답한 소리 마슈. 대목장 본다고 다들 한꺼번에 들고 나오니 올라갈 리가 있나."
"삼대 거짓말쟁이인 장사꾼 말을 누가 믿어."
"아따, 조선시대 적부터 단골인데 고추 몇 근 값 속이겠소. 보자. 열닷 근에서 좀 빠지네. 킁킁킁."
저울을 내려놓으며 큰 인심 쓰듯 자기 마대에다 쏟아 붓는다.
"뭔 소리요. 열여섯 근도 넉넉하게 달았는데. 여러 말 할램 도로 내주쇼."
넘어져도 손 짚으면 닿을 만큼 가깝게 남은 장터까지 끌고 가면 몇 푼이나마 더 받는다는 걸 아는 아버지가, 마치 산적처럼 길목을 지키는 장사꾼 손을 못 벗어난 게 아쉬워서 자루를 꽉 붙잡고 마지막 싸움삼아 버텨본다.
"아, 알았어요. 점잖은 사돈님 꺼니 잘 쳐줄 게.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더 주더란 소문내면 안 되우."
손때 찌든 전대를 뒤져 셈을 서두르는 능구렁이 사내.
"만약 장시세보다 덜 왔음 이따 되받아갈 줄 각오하고 있으쇼."
아버지가 꼬투리 삼을 말뚝 하나 박아두지만 늘 그렇게 끝나는 얘기다. 곡식장수 눈은 벌써 멀리 오고 있는 다른 장꾼의 짐덩어리를 노리고 있다.
명절을 코앞에 둔 장마당은 살 사람 반, 팔 사람 반이다. 아버지가 어전 골목으로 들어선다. 늘 정해놓고 들르는 데라 단골대접 해주는 생선가게로 발길 향한다.
"조기 한 두름, 도미랑 민어도 몇 마리 줘요. 제상에 올릴 거니 젤 나은 걸로."
크고 좋은 걸 정성껏 고르신다. 싸리나무 가지에 키를 맞춰 꿰어진 북어 한 쾌도 집었다. 조상님 제상에 올릴 물건이라 하여 값을 깎지도 않는다. 곡식 거간꾼과는 끝전 한 푼 갖고 다투었지만 조상님께 차려 올릴 제수의 가격을 깎으려고 입씨름하는 것은 불효라는 것을 어린 나도 새겨 배운다.
과일은 무게 나가니 나중에 사기로 하고 더 살 것과 쌈지의 돈을 아귀 맞춰본 아버지는 근처 신발가게로 가서 내 발에 넉넉한 칫수의 검정고무신을 한 켤레 사주신다. 헌 고무신은 보따리 틈에 끼운다. 모았다가 나중에라도 고물장수한테 빨래비누라도 바꾸게 챙겨오지 왜 버리고 왔냐는 엄마 군소리를 예상했을 것이다. 장을 다보고서야 노점의 찐빵 몇 개를 사서 내손에 쥐어주신다.
"너 다 먹어라. 난 아침 먹은 속이 거북해서 안 들어간다."
한나절 기울도록 따라다닌 나는 아버지 생각은 않고 혼자 다 먹어치웠다. 아버지는 장에 갈 때보다 더 무거운 제수 거리를 지게에 지고, 난 새끼줄로 질빵을 만들어서 가벼운 것들을 걸머맨 채 온다. 몸은 고생스럽지만 새 고무신 신은 걸음은 날아가듯이 가벼웠다.
《사격장에 핀 들국화》
학교 공부 마치고 돌아오는 중간쯤에서부터 난 오늘 사격을 한다는 걸 알았다. 콩 볶듯 하는 총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총소리만 들어도 사격하는 총의 종류까지 가려내는 나다. 마음이 들떠 걸음을 빨리 했다.
아니나 다를까. 빨간 깃발을 든 군인이 길을 막았고 이미 여러 사람들이 발이 묶인 채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사격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군인들은 여기 자주 와서 바위벼랑 쪽으로 사격 연습을 한다. 한바탕 쏘아대고 나면 길 반대쪽 경계병에게서 신호가 온다. 사격 끝났으니 사람을 통과시키라는 뜻이고 그제서야 길 양쪽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지나간다. 그중의 여러 사람들은 그냥 눌러앉아 있다. 어른이든 아이든 인근 동네에서 총소릴 듣고 와 기다리는 중이다. 군인들을 태운 트럭이 떠나자 사격장 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나도 내달린다.
총 쏘는 사대를 먼저 차지해 맨발을 벗고 잔디 풀을 자근자근 밟아나간다. 발에 탄피가 밟힌다. 감각으로 느껴지는 순간의 희열을 누가 알까. 이걸 찾지 못해 호된 기합을 받고 돌아간 군인들 사정이야 어떻든 나한텐 아주 소중한 돈벌이다.
탄피부터 주운 다음 표적지 쪽으로 간다. 사격 끝내놓은 바위 절벽 밑에는 마치 타작 끝난 마당처럼 탄환과 납 조각들이 널렸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주운 다음엔 흙을 파서 땅속에 묻힌 것들을 찾아낸다.
동전 한 닢 구경하기 힘든 산골에서 사격장은 아주 고마운 곳이다. 갈포벽지공장으로 보낼 칡 줄기를 끊어다가 파는 건 여름 잠깐이지만 사격장에서는 사철 내내 놋쇠를 주워 고물상에 팔아서 용돈을 벌수가 있다.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챙겨 다니는 헝겊 주머니를 해가 기울기 전에 꽉 채워야 된다.
갑자기, 멀리서 요란한 폭음이 났고 난 그쪽으로 했다. 사람들의 아우성소리와 함께 우왕좌왕하더니 한 소녀가 아이를 업고 울면서 내려왔다. 등에 업힌 아이는 피를 흘린 채 축 늘어지고, 낡은 치마저고리의 누나는 사색이 되어 동생을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봤을망정 우리 학교에 다니다 그만둔 남매였다. 남자 아이의 피 흐르는 맨발은 흙투성이다. 애들 부모는 사격장에서 주워온 포탄을 만지다 터지는 바람에 함께 돌아가셨다고 했었다. 갑자기 고아가 된 남매는 살길이 없었고 어른들이 하는 걸 본 대로 사격장에 드나들었을 것이다. 하긴 어린 나이에 보고배운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으니 먹고 살려면 방법이 없었을 거다.
그 아이가 변변한 치료도 못 받아보고 짧은 인생을 접었다는 소문을, 얼마 뒤에 아이가 사는 동네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됐다. 한동안 지난 다음에 바라보니 사격장의 바위벼랑엔 들국화가 곱게 피어있었다.
《생명의 봄날》
질긴 겨울 끝나 6학년에 올라갔어도 학교 안 나가는지 여러 날 째다. 오늘부터 엄마랑 사방공사 일을 나가기로 했었다. 삽과 괭이 하나씩 챙겨 마을 사람들을 따라나섰다. 지난 해 폭우 때 사태를 만난 산비탈을 찾아 계단을 만들고, 돌로 축대를 쌓고, 떼를 떠다 입히고, 뿌리가 빨리 퍼지는 오리나무나 아카시아를 심는 일이다.
사흘 해야 밀가루 한 포를 준댔으니 둘이 하면 곱절의 양식이 생기게 된다. 외국원조구호식량을 그런 방법으로 분배해준다. 사방공사는 동네사람끼리의 자치 울력이나 다름없어서 입으로 감독하는 사람, 돌장승처럼 서있기 일삼는 게으름뱅이, 그리고 나처럼 절반 일꾼 구실도 못하거나 이름만 걸러 나온 상노인을 빼면 젊고 바지런한 알짜 일꾼 몇 사람이 일을 주동해나가기 마련이다.
어른들 뒤에서 그럭저럭 하다 점심때가 됐다. 배꼬리 짧은 사람들은 펑퍼짐한 델 먼저 골라 각자 챙겨온 밥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슬그머니 계곡으로 내려가는 엄마를 나도 주저주저 뒤따랐다.
"어디들 가? 점심 안 먹구."
"물 먼저 먹고 오게요."
우리가 점심 안 가져 온 줄은 대부분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 눈길이 따라오지 않을 가파른 기슭을 기어오르며 엄마는 나물을 뜯는다. 행주치마를 걷어 올려 묶은 옷자락에다 부지런히 산나물을 뜯어 담는다. 나도 함께 뜯는다.
나물은 지천이다. 워낙 흔하기도 하지만 내가 웬만한 여자들 못잖게 나물을 잘 안다. 원추리, 곰취, 어아리, 곤드레나물...이른 봄마다 새 풋나물들은 죽음 직전의 우리 식구들 목숨을 푸릇이 소생시켜 주었고 그래서 난 먹어도 되는 풀인지 아닌지를 잘 구별해내는 것이다.
손 가득 움큼에 찰 때마다 엄마 치마폭에 담았다. 다시 한 줌이 되면 또 담는다. 나물무게에 휘청거리는 엄마를 따라 나도 일할 자리로 돌아왔다. 점심 먹은 사람들은 빈 그릇을 거둔 뒤고 더러는 양지바탕에 누워 토막잠 코골이를 하고 있었다.
"점심도 안 먹고 어딜 갔었대? 워낙 적게 가져온 데다 입이 여럿이라 골고루 안 돌아가네. 맛이나 보우."
이장댁이 감자떡 두 개를 남겨놨다가 우리 모자의 몫을 나눠주었다.
"다 잡숫지 그랬어요. 배부른데."
쑥스럽게 건네받는 울 엄마, 나는 받아든 떡을 입에 통째로 넣고 깨물었다. 턱뼈가 마치 녹슨 가위처럼 뻑뻑하고 침샘은 터질 것 같았다. 이틀 만에 먹이다운 먹을 걸 입에 넣어본 셈이다. 굶는 것도 처음 한두 끼가 힘들지 그 고비가 넘으면 아예 감각을 모른다. 다 먹길 기다렸는지 엄마가 손에 움켜쥔 떡을 슬쩍 건넸다.
"배 아파서 못 먹겠다. 너 다 먹어라."
난 받아든 떡 귀퉁이를 조금 떼어먹고 주머니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나는 멀리 도랑둑의 영국이를 보았다. 나랑 같은 학년이지만 걔는 읍내 학교로 전학을 가서 공부하다 일요일이라고 집에 온 모양이다. 난 반가운 마음에 그리로 갔다. 중학교 합격하는 조건으로 미리 사준 염소를 풀 뜯기는 중이었다.
"영국아, 이리와 봐."
난 주머니의 떡을 꺼냈다. 이미 딱딱하게 굳고 오후 내내 주머니 먼지가 붙은걸 대충 손톱으로 뜯어내서 영국이한테 내밀었다. 동생들 주려고 남겨왔지만 지난번 한창 배곯을 때 친척집에서 얻어왔다는 고사떡을 나눠준 생각이 나서였다. 그날, 얼마나 고마웠던지.
"이거 먹어."
받아서 이리저리 들여다보는 영국이 얼굴엔 전혀 고마운 티가 나질 않는다.
"야 임마, 이런 걸 어떻게 사람이 먹냐. 내 염소도 안 먹을 거다. 볼래?"
영국이가 떡을 염소 입에다 물려주었다. 과연 염소는 코를 한번 실룩인 다음 캑- 뱉어내는 거였다. 난 둔덕을 어떻게 넘어왔는지 모른다. 길은 마냥 좁아서 발이 자꾸만 수펑으로 헛디뎌졌다.
'영국아. 넌 너무했어.'염소도 안 먹고 뱉은 마른 떡쪼가리를 슬쩍 주워들고 온 나는 뒤를 돌아보며 꼬옥꼬옥 씹었다. 이제껏 숱한 굶주림의 고비에 맞서온 터였지만 그 가난 때문에 눈물 나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엄마한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 집은 왜 남보다 더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 소유라곤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왜 떠나질 못하는지도. 엄만 풋나물을 삶는 중이었다. 이미 다 데쳐서 찬물로 헹궈 맷방석 골고루 펴 널고 있었다. 아직은 묵나물 하기에 이른 철이지만 엄마는 돌아올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나서 난 이제까지 벼른 모든 물음들을 꿀꺽 삼켰다. 따로 물을 필요가 없었다. 눈앞의 모습이 가장 확실한 대답일 테니.
미루던 끝에 나온 밀가루 몇 포대나마 하루라도 늘려먹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수제비, 칼국수, 쑥버무리... 빵을 해먹으면 하나라도 더 집어먹게 되어 헤프니 웬만해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엄마는 밀가루를 팔아서 더 싼 것을 사다 오래먹어야 한다지만 흉년 보리 겻떡도 흔하면 싸다했듯이 서로 팔겠다고 한꺼번에 장에 내가니 제값을 받기 어렵다.
"마음을 잘 쓰면 인왕산 호랑이하고도 사귄다더니 별일이 다 있네."
밀가루를 바꾸러 장에 나갔다 그냥 가져온 엄마가 요즘 들어 가장 환한 얼굴로 묻지도 않는 말을 꺼내셨다.
"우시장 앞에 막국수집이 있잖니. 거기에 밀가루를 팔려고 들어갔더니만 글쎄 그러지 말고 찐빵장사를 하라는 구먼. 생가루 그냥 파는 것보다 몇 곱절 이문이 있대. 자기네 가게 앞에 자리를 내준다니 장날만이라도 해봐야겠다."
엄마는 마음이 들떠 붉은 팥을 삶아 소를 만들고 밀가루 반죽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랫목에 이불 씌워둔 반죽은 아무리 기다려도 부풀질 않는 것이다.
깊은 밤, 엄마는 실패했다는 걸 느꼈는지 식구들이라도 먹으려고 솥에다 쪘다. 금방 꺼내 뜨거우니 입에 조금 떼어 씹었다. 그러나 이건 찐빵이 아니었다. 역겹고 쓴 맛. 엄마와 동생이 돌아가며 혀에 댔지만 모두 얼굴을 찌푸리며 뱉어냈다. 한참만에야 이유를 알았다. 글씨를 모르는 엄마가 소다로 잘못 알고서 지난여름에 쓰다 남은 디디티 농약을 넣은 것이다.
디디티는 농사에만 아니고 사람이나 짐승들한테 꾄 벌레도 잡는 약이라 웬만한 집엔 다 있다. 다행히 약이 조금만 들어갔고 빵을 많이 먹지 않아서 사고는 나질 않았다. 아까운 찐빵은 먹질 못하고 퇴비장 깊이 묻었다. 남의 짐승들이라도 파내 먹으면 안 되니 나는 며칠을 두고 자주 둘러보았다.
《풋살구 향기》
학교 마치고 개울 건너 샛길을 올라오면서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 뒷모습이 금옥이라는 걸 알았다. 난 자치걸음으로 열심히 따라잡았다.
"누나, 어디 갔다 와?"
깜짝 놀라 돌아보는 금옥의 얼굴이 빙그레 웃지만 많이 상기되었다. 보건소에 가서 약을 타 올 거란 생각이 퍼뜩 든다.
"어, 미래 음악가님을 여기서 만나네."
"창피하게, 그거 무겁지?"
난 누나 손에 들린 큼지막한 보따리를 뺏어들었다.
"이 먼 길을 매일 오가자니 고생되겠다."
힘에 부친 누나가 다릴 쉬려는지 고개목의 쉼터에 앉는다. 미루나무 그늘이 넓고 평바위가 있어 쉬기 좋은 자리에 나도 따라 앉았다. 전보다 더 핼쑥한 금옥이 얼굴. 거머리 힘줄 까맣게 돋은 손으로 길가 애기똥풀을 툭툭 뜯는 걸 보며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꺾인 자리에선 금세 애깃똥 같은 노랑물이 배어났다. 고운 색깔만 보고 무심코 입에 가져다댔던 금옥이는 죽을상이 되어 침을 뱉기 시작했다. 바튼 기침 할딱이며 한참을. 난 거짓인가 하여 덩달아 입에 댔다. 아 정말 지독하게도 썼다. 미소를 지워버린 누나가 얼른 말을 돌렸다.
"용아. 오늘 우리 집에 와서 안 잘래?"
"왜?"
"엄마가 조카 돌상 차린다고 오빠네 집에 가서 집이 비어."
"같이 가지 그랬어."
"응, 내가 안 간댔지. 혼자 있을램 무서울 텐데 어떡하냐. 올 거지?"
안간 게 아니라 안 데리고 갔을 게다. 금옥이 누나는 마치 못 쓰는 물건처럼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식구들한테도 저렇게 내팽겨지기 일쑤다.
"숙제도 할 겸 웬만하면 와라. 기다릴 게."
저녁을 먹고 나서 누나네로 향했다. 엄마가 알면 큰일이라 눈치껏 집을 나섰다. 약하고 겁이 많은 누나를 혼자 있게 하면 안 된다. 방에 들어서자 반색을 한 누나가 기름 아끼느라 낮췄던 등잔 심지를 훌쩍 돋우었다. 방안이 좀 밝아졌다.
내심 기다렸다는 듯 보구미에 챙겨두었던 살구를 건네준다. 아직 신맛 가시지 않았어도 향기 머금은 몇 알씩 나눠먹은 다음 옆구리에 끼고 간 숙제거리를 펼쳐놓았다. 다가온 금옥이가 거들어주겠다고 몇 문제 참견하더니 곧 포기하는 눈치다. 말이야 2년 앞섰지만 학교에 다니다 마다해서 나보다 나을게 없다. 숙제를 해치우고 나니 어색할 만큼의 시간이 남았다. 듣기 좋은 가곡을 불러보라기에 몇 번 망설이다가 '매기의 추억'을 옥타브 낮춰 흥얼거렸다.
"몇 곡 더 불러봐. 네가 있어서 안심되고 잔잔한 노래 들으니까 저절로 눈이 감기네. 나 잠들거든 너도 불 끄고 자라."
누나가 돌아누우며 말했고 '오, 수잔나'를 중간쯤 부르다가 멈추었다. 금세 잠든 누나. 난 내 몫으로 펴준 옥양목 호청을 끌어다 덮었다. 쉽게 잠들지 않았다. 조용한 시간에 바로 옆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숨소리. 그건 다른 사람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증명이다. 내가 살아있고 또 누군가 내 곁에 있음을 뜻한다.
몸을 뒤척인 누나의 작은 가슴이 바로 들어왔다. 속옷자락에 가려졌다가 살짝 흘러나온 속살은 머리맡에 남겨둔 살구를 연상시켰다. 그 상큼한 내음까지 되살아났다. 언제 스러질지 모르기에 더 아쉽고 애잔한 풋향기...
이상한 일이었다. 한 번도 그런 적 이 없었다. 몸에 야릇한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르르 떨려오는 이 느낌은 무얼까. 누나가 갑자기 눈을 뜨면 고스란히 들켜버릴 것 같아 불을 껐다. 여느 때의 원수 잠들은 어디로 갔는지 머릿속이 점점 하얘진다. 이러면 안 된다고 느끼면서도 나도 모르게 누나의 갈래머리에 손가락을 살짝 댔다. 아무런 반응도 없다. 난 손끝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나쁜 짓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마치 마당가에 갓 피어난 봉숭아꽃을 만져보고 싶은 호기심처럼, 다만 그랬다. 깊이 잠들었는지 미동도 않는 누나. 약한 몸으로 읍내 다녀오느라 피곤했나보다.
밤엔 모든 게 자고 있어 조용하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산골의 많은 것들은 밤을 꼬박 새운다. 아니, 밤에 더 요란하다. 철 이른 귀뚜라미, 온갖 풀벌레와 밤새들, 나무나 풀잎에 몰아치는 바람, 간간이 짐승 우는 소리도 났다. 당산나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지난번 고사 때 무당이 치던 북소리도 들렸다. 누나 혼자라면 이 밤이 정말 무서웠을 거였다.
가위에 눌리거나 나쁜 꿈을 꾸는 것일까. 누나가 나뭇잎에서 떨어진 애벌레처럼 동그르르 몸을 오그렸다. 깜짝 놀란 난 누나 머릿결에서 얼른 손을 뗐다. 누나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말했다.
"용아. 너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지?
"..."
"다음부턴 용서 안할 거야. 어서 잠자."
아, 그런 게 아니었는데. 누나가 오해하고 있다. 더 못된 짓이라도 했을 거라 의심하는 것 같다. 머리를 방바닥에 내리박아서라도 없어져버리고 싶었다. 창호지가 밝지만 아마 싹둑 달빛일 거였다. 부끄러워서 다시는 누나 얼굴을 똑바로 보질 못하리. 난 슬그머니 일어났다. 환해지기 전에 어서 도망쳐야 한다. 걸린 문고리를 따는데 누나가 말했다.
"용아. 너 빨리 자게 하려고 일부러 화냈어. 알지? 조금만 있으면 날이 샐 거야. 그때까지 좀 있어줘."
그렇다. 누나 홀로 남겨두고 가는 건 더욱 못할 일이었다. 난 미닫이만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먼동이 터온다. 문을 열고 집으로 내달렸다. 비단버선을 신고 온 듯, 소리 없는 안개가 몽땅 차지한 새벽. 그날 낮에 우연히 마주친 누나는 여느 때처럼 밝고 싹싹한 모습이었고 바람결에 이슬 털어낸 버들잎처럼 싱그러웠다.
《개여울과 섶다리》
올해 역시 앞, 뒷방 문짝에 창호지부터 새로 바른 엄마랑 곡식이삭을 주우러 나왔다. 날 더 춥기 전에 한 톨이라도 더 모아 들여놔야 겨울고생을 덜 하게 된다.
가을엔 놀아도 들에 나가 놀라고 했고, 가을밭과 친정에 가면 쥐고 올 게 있다고 엄마가 말했지만 너무 늦은 철이라 들판은 텅 비었다. 손 부지런한 사람들에 이어, 곧 삭아버릴 가을볕이 아쉬운 게으름뱅이들까지 거쳐 간 뒤에다, 쥐와 새들조차 제 몫은 다 챙겨갔으니 흘린 이삭 하나 변변히 남았을 리 없다.
일손 꼼꼼한 해숙이네 '세모텡이밭'을 절반이나 뒤졌어도 고구마 몇 개, 성이 안차서 집으로 내려오는데 양쪽마을 사람들이 놓다가 가을장마로 중단된 큰개울의 지네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틀 전에 금옥네는 저 개울을 맨발로 건너 떠났다.
귀에서 입으로, 뜻밖의 소문이 돈 건 첫서리 찬바람 무렵이었다. 금옥이 누나네가 이사를 간단다. 큰 오빠가 읍내에 차린 다방이 잘못되었다고 했다. 땅을 다 팔아도 빚이 남는다고 이웃들이 수군거렸다. 잘 돼서 떠나는 거라면 좀 나으련만 이렇게 허무한 이별을 맞다니.
누난 병을 거의 이겨내고 있었다. 나날이 몸이 좋아져 뽀얀 얼굴과 훌쩍 큰 키까지 한창 피어난다는 칭찬이 동네 어른들은 물론 엄마 입에서도 자주 나왔다. 그런 말이 돈대서만 아니라 내 눈에도 엄청 예뻐 보였다. 얼굴 마주칠 때마다 자꾸만 쑥스러워지고, 그렇다고 생각해선지 누나 역시 수줍음 타고 볼을 붉혔었다.
마을사람들이 줄줄이 짊어진 이삿짐 맨 뒤를 따라 우리 마당을 지나가던 누나가 걸음 멈추며 말했다.
"용아, 잘.. 지내."
엉엉 운 것이 아니고 눈물 펑펑 쏟은 것도 아니었다. 겉에 비치진 않지만 말 끝나면 바로 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이었다. 여길 떠나고 싶다고 번번이 하소연하더니 막상 떠나면서는 왜 저렇게 슬퍼할까.
누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굴뚝께로 갔다. 거긴 아무도 볼 사람 없는, 가장 은밀한 장소였다. 서로 마주볼 땐 담담했었지만 외레 내게서 더 많은 눈물이 쏟아지다니. 마치 동네 사람이 한꺼번에 왕창 떠난 듯 휑한 감정에 눈물이 솟았고 그치질 않았다. 어차피 우리가 먼저 마을을 뜨든, 누나가 떠나든, 곧 헤어질 거란 질긴 예감 끝이어서 서러움은 더했다.
살얼음 끼기 직전의, 늦가을과 겹친 초겨울이라 냇물 몹시 차가운 계절. 내일은 엄마랑 섶다리 놓는 울력에 다시 나가야 된다. 누나가 황새종아리 내놓고 건너간 개울 위, 중간이 끊긴 채 걸려 있는 지네발다리를 완성해야 학교 다니기도 편하다.
(바보 누나, 며칠만 더 있다 가든가. 그럼 섶다리로 건널 수 있었을 거 아냐. 나 때문에 흉터가 생긴 맨발, 엄청 시렸지?)
《산불, 그 후》
불길을 처음 알려준 건 사람이 아닌 동물들이다. 순하기로는 세상에 둘도 없을 검둥이가 갑자기 짖어대고, 제 둥지를 찾아 깃을 내리기 시작한 백로들이 요란스레 우짖었다.
심상치 않은 걸 짐직한 엄마가 문을 열어보더니 비명에 가까운 소릴 지른다. 덜컥 놀란 나도 덩달아 밖으로 나왔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시커먼 연기가 먼저 산등을 넘어오고 뒤따라 검붉은 불길이 기세를 올리며 산비탈을 휘덮어가고 있었다. 개밥바라기 무렵의 이른 저녁밥상을 채 거두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다.
오래 묵은 숲이 타면서 내는 요란한 소리, 눈조차 뜰 수 없도록 매캐한 냄새, 온 하늘을 가득 덮으며 날아오르는 재티들, 모든 걸 다 녹일 듯이 닥쳐오는 뜨거운 열풍, 온 마을은 공포의 불도가니가 되어갔다. 집을 세는데 다섯 손가락이면 되는 작은 골짝 사람들이 모두 뛰어나와봤자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삽시간에 나무들을 삼킨 불은 산 밑에 바짝 붙여 지은 우리 집으로 옮겨 붙었다. 어떻게든 불길을 잡아보겠다고 물을 퍼 나르는 사이, 동네 복판에 있는 샘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전쟁 이후 가장 참혹한 재앙은 하필이면 가난하디 가난한 동네의 알량한 우리 살림마저 몽땅 살라버릴 모양이었다.
공포의 밤을 지새우고서야 불길은 잡혔다. 아니, 잡힌 게 아니라 태울 걸 다 태우고 제풀에 꺼진 셈이다. 여느 아침과 다름없이 불끈 오른 돋을볕에 드러난 모습이 아주 낯설어 보인다. 드문드문 남은 주춧돌이 사람 살던 터라는 걸 알려주는 흉물스러운 집터에 이웃사람들의 도움으로 당장 몸만 누울 움막집이 급하게 지어졌다.
우리 마을사람들은 화전을 일구기 때문에 다들 불을 잘 다루었다. 불을 겁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이제까지의 그런 오만과 방심이 불행의 빌미가 됐을지 모를 일이다. 밥밑콩 한 포기라도 더 심어먹을 욕심으로 밭두렁을 태우다 불을 냈다고 지목된 태호 할아버지가 잡혀가면서 동네는 폐촌되 듯 점점 뒤숭숭해졌다.
여러 날이 흐르고 그 사이 밖엔 봄이 와 있었다. 불탄 민둥산에 올라갔다. 죽은 듯하던 산자락의 나무 그루터기에 작은 순이 돋고 있다. 그 밑 움푹한 그늘에서 개개비가 둥지를 지어 하얀 알을 품는 중이었다. 불기운에 데어 죽었을 줄 알았던 나무들도 난 꿋꿋하다는 듯이 여느 해보다 서둘러 잎을 틔웠다.
엄만 키가 껑충하도록 철부지 짓만 골라하는 맏자식을 그냥 놔두지만 않을 눈치다.
"황토구뎅이에 가서 흙 좀 퍼오너라. 집 손질을 해야겠다."
난 황토 구덩이로 간다. 다른 데와 달리 붉은 찰흙이 나오는 데다 온 동네사람들이 파가서 큼지막한 굴이 생긴 곳이다. 함지박 가득 퍼 담으니 무게도 만만치 않아 두어 번은 쉬어야 집에 닿는다.
엄마가 흙에 물을 부어 고루 개서 곤죽을 만든다. 급하게 만드느라 엉성해보이던 아궁이와 부뚜막에 진흙을 덧바른다. 모자랄 것 같으니 더 퍼오라는 성화에 난 군말 없이 황토구덩이를 오간다.
이번엔 바람벽 틈을 찾아 메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갔다 오라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부아가 솟는다. 처음부터 그랬으면 큰 소쿠리 얹은 지게로 져 날라서 여러 번 왕복하는 생고생을 덜었을 것 아닌가.
흙을 지게가득 넘치도록 듬뿍 퍼다 심술스레 부려 놓는다. 엄만 집을 한 바퀴 돌며, 황토반죽으로 틈새를 메우고 거친 덴 진흙물을 발랐다. 품 좀 들었대서 엉성하던 집이 훨씬 나아졌다. 남은 진흙이 아까워 구석구석 쥐구멍까지 다 찾아내 막은 엄마가 결심한 듯 조곤조곤 말했다.
"그동안 여러 번 망설였다마는 더 미룰 거 없이 이사를 가기로 작정했다. 다 니들을 위한 일이여. 옳은 결정인지야 나중에 판가름 날 테지만."
희망 없고 암담한 나날들에 지친 부모님은 가족을 이끌고 이농 대열에 합류하였다. 우리 몫으로 가진 거라고 별로 없으니 작심하기 홀가분했을 것이다. 어차피 버려두고 갈 집인데도 엄마는 왜 꼼꼼히도 손질했을까.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 모르고, 우리 대신 와서 살 그 누군가를 위해서였나.
이삿짐 보따리 몇 개를 여섯 식구가 나누어 이고지고 나란히 섶다리를 건넜다. 지체장애로 가장역할 다하기 버거운 아버지와, 그 짐을 대신 져오던 엄마가 뒤를 돌아보며 눈물을 삭였지만 난 앞길만 내다보며 모진 발길을 옮겼다. 어딜 가든 여기보다 더 막다른 땅을 만나기야 하겠는가. 떠난 뒤 찾아오지 않는 금옥이 누나도 어디선가 만날 수 있으리. 꼭 잘 돼서 난 다시 돌아올 거다.
지난 가을에 챙겨둔 호주머니 속의 추자 두 개가 걸을 때마다 달그락거렸다. 내 나이 열세 살이었고, 50여 년 객지살이 세월이 느린 강물처럼 흘러갔다.
《매듭 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그 땅을 잊지 못한다. 언젠가 떳떳이 돌아가야 하기에 죄를 지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런 심정으로 살았다는 뜻이지 입바른 소리하는 나인들 그동안 크고 작은 허물이 왜 없었으랴. 나름 고달팠던 타향살이 접고서 노후 안식처로 삼으려는 듯한 몰염치도 선뜻 내키지 않거니와, 귀촌이든 귀농이 됐든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개인사정 앞에서 난 아직도 나그네일 뿐이다.
몸이 갈 수 없다면 마음만이라도 돌아가서 풀어놓을 봇짐을 꾸리듯이, 이렇게나마 애증과 그리움을 찾아 떠난 기억회귀여행에 아직 미완인 마침표를 찍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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