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총알처럼 깊이 박힌 옹이 하나가 있었다. 아무한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체증 같은 내 치부(恥部)였다. 뉘라서 일생에 상처 하나 없는 이가 있을까마는 배신에 의한 상흔은 한번 묻으면 지우는데 애를 먹는 송진하고 비슷해, 여태까지 난 사람에 대한 환상이 없다. 그래도 세월이 약이란 말은 허구가 아니었던지 활화산 같던 분노가 얼추 눅어졌지만 정적(靜寂)한 상태로 회복이 되려면 필경 '내가 누운 관 뚜껑에 떵떵 못질하는 날'이나 되어야 풀릴 미망(未忘)이다.
세월 따라 자연히 문리도 트이고, 늙음을 일러 쓸모없이 낡은 것이라기보다는
점차 익어간다는 걸 의미한단 말이 적지 않은 위로와 공감으로 다가든다.
언제 연륜의 더께는 이만치나 두터워졌는지 깨단하고 보니 이미 해질녘이다.
팔팔하던 청춘은 어디로 가고, 정배기엔 어느 새 무서리가 희끗희끗 황혼이 완연하
다. 강물에 뜬 풀잎같이 떠내려 온 한 생애라니, 덧없고 속절없기가 꿈인 양 허망하다.
느닷없는 폭풍우에 번롱(翻弄)되는 난파선 같이 숱한 시간, 내 안에다 날 가둔 채 고투했던 나날들... '어느 방향에서 부는 바람인들 난파선에 역풍 아닌 것이 있을까'마는, 지금까지 살아있으므로 자신과의 치열했던 고락을 회억할 때마다 안타까운 아쉬움만 항하사(恒河沙)같다.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 속살속살 새살 돋는 조짐은 세월로부터 한 수 받은 가르침 중, 가장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인다. 덕분에 이제는 남 말 하듯 담담하게 내 이야기도 꺼내 보일 수가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한 생애를 두고 지향 하는바 이상을 추구하고 실현하다 간다. 개중엔 배우자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배신 사례도 없진 않지만 당최 그런 부도덕한 일 같은 건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려니 무심하였다. 헌데 일고의 가치를 두지 않았던 그 문제가 정작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나, 억장이 무너졌다.
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목숨 값 참되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다 가리라, 신망도 굳세었건만 한 어머니한테서 나온 내 동생과, 평생을 약속했던 남편과의 불륜이 내 원(願)을 무참하게 박살내고, 회복을 기대하기 난감한 상태로 영혼을 황폐화 시켜버렸다. 충격은 세기(世紀)적인 것이었고 상처 또한 치명적이었다.
그 일을 통해 절실하게 느낀 것이 대저 사람의 인격은 그리 신뢰함직한 것이 못 되는구나, 하는 회의(會意)였는데 그것은 인간의 속성을 새로운 측면에서 보게 된 성찰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여자와의 하룻밤 객기였다면 아마 불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거니 체념하고 상응한 화풀이 정도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허지만 남편이 상대한 여자가 천만뜻밖에도 내 동기간(同氣間)이고 보니 입을 열려 해도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어서 속으로만 전전긍긍 펄펄 뛰었다. 졸지에 벼락 맞은 것 같은 일이 얼마나 기막힌지 그 카오스(chaos)적인 충격은 내 정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상처와 좌절을 다스리기 위한 어떤 위로와 격려도 소용이 없었다. 오직 극기로써 배반의 욕됨을 다스려야 하는 번뇌는 시간이 자날수록 더 심화되고 증폭 되었다.
내가 어른이 된 지금까지 배운 모국어를 총동원한대도 그 고통을 적절하게 형언키가 어렵다. 자존심은 언감생심, 수치스럽고 망신스럽다는 자괴감에 치어 한바탕 분풀이를 할 만한 용기는 싹을 내어보지도 못했다.
'가벼운 고뇌는 큰소리로 외치지만 워낙 큰 고뇌는 침묵 한다' 던가.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나 상처도 인생의 일부라면 그 마저도 감수할 수 있어야 사람인 것을, 극렬하게 일어나는 분심에 꺼둘리어 애 터지게 살아야 할 명분을 잃 게 되자 종내 이런 치욕을 견디느니 차라리 죽어버리자는 작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생의 한 수를 도로 물리고 싶다는 고백이거나 탈 도덕을 지탄하는 항의일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사랑하면 늘 가슴에 푸른 신호등이 켜진다고 믿었던 내 어리석음의 극치에 절망한 것일 수도 있었다. 곧은 성정에 과부하가 걸리자 피폐해진 심사가 도망치듯 선택한 자구책이 음독이란 극 처방이었던 셈이다.
그런 결심을 하고 나자, 우선적으로 대두되는 급선무가 내 사후 문제였다.
D-데이(day)를 어느 날로 정하느냐, 하는 것도 관건이었지만 그보다는 당장 내가 없어지면 저 어린 6살, 4살짜리 자식들을 누가 돌보나, 기기 차고 막막하였다.
'새 둥우리가 망가졌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알인들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낭패한 심사에 노심초사 궁구 해봐도 달리 이거다 싶은 묘안이 없다보니 암담하기가 캄캄한 밤바다에서 폭풍우와 사투하는 난파선이라 한들 보다 더할까.
제일 좋은 방법으론 내배아파 낳은 자식을 어미인 내가 키우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무엇일까만 나는 이미 생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사람. 뒤에 남은 자식들의 충격이나 슬픔은 누가 달래고 최소화 할 수 있을지, 또 항구적인 대안은 무엇인지 답을 찾지 못해 고심참담하였다.
질정 없이 일어나는 번뇌 가운데서도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라면 자식에 대한 남편의 기본 인성과 부성애만은 썩 신뢰함직하다는 사실이었다. 허기사 짐승도 제 새끼는 함, 한다는데 아비 된 자가 어미 잃은 자식한테 어찌 무심할 수가 있으리.
분명 내 몫까지 두 배로 잘 거두리란 믿음은 자신을 달래는데도 다소 효과적이었다.
괘심하고 끔찍한 소행으로 치자면 뒤돌아볼 여지가 없는 일이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는 아이러니(irony)하게도 그들의 불륜 사실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졌다. 소행머리로 치자면 부처도 돌아앉을 패륜인데도, 기왕에 벌어진 일, 차라리 두 사람이 합쳤으면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는데, 솔직히 절박한 상황에서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내 희망사항이기도 하였다.
남이 아닌 이모니까 누구보다 잘 챙기고 거둘 것이란 생각이 저간의 허물을 싹 덮어버려 역설적이지만 그런 사념(思念) 자체가 위로이자 조금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죽어도 갈등 없이 눈을 감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마저도 내 사후의 일이므로 가정(假定)이나마 그리 해볼 수가 있었던 것이지만 막심한 심로(心勞)에 그만한 위안도 없었기에 윤리적으로 과연 얼마나 타당한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아예 념(念)에도 없었다.
그 당시 남편은 국가 기술자격 1급 소지자로 무선 통신사였다. 그의 업무 특징은, 육상에 있는 무선 기지국과 해상을 운항하는 선박간의 통신을 운용하는 것이었다.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하고부터 지금은 오퍼레이터(operator)가 조작을 담당하겠지만, 그때는 순 아날로그 방식인 모르스(Morse)부호(점과 선을 이용, 문자나 기호를 나타내는 전신부호)를 사용, 통신사가 타전함으로써 쌍방 간의 송수신이 이루어지고 그로서만 소통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사단이 났던 무렵, 남편의 입지 정황은 외국적 선사(外國籍 船社)와 2년간의 계약 체결 중이었고, 종료 기간이 아직 1년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공식 1개월 휴가를 보내던 참이었다. 한 달 휴가에 재 출국 일자까지는 기껏해야 20일 정도밖에 안 남았었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 늦어도 1주일 안에는 모든 걸 끝내야 일처리가 무난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특히 내 장례 뒷수습에 관해선 아이들을 위해서도 남편이 있는 편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란 계산을 한 것인데 그렇다면 일주일 안에는 실행에 옮겨야 무난할 일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잡아 일주일 정도밖에 없다는 생각은 사람을 무량으로 불안 초조, 절박하게 만들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선후가 있고,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과 도덕적,
윤리적인 측면에서 기본적인 책임이 따른다.
내가 자살을 결심하리만치 큰 분에(憤恚)와 배신감에 절망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남편은, 항려(伉儷)가 지켜야 할 기본 원칙에 회생불능인 파울(foul play)을 범한 것이었다. 그 배신의 상처가 얼마나 치명적이었던지 남편이 곧 우주였던 나한테는 사형 선고나 다를 바 없는 대참사였다.
끊임없는 회의와 자책 사이에서 자신과의 싸움이 치열하였다. 무엇보다 아이들 처지를 생각하면 마치 '내 건너간 놈 지팡이 팽개치듯' 그늘 한 곳 없는 모래사막에다 방치하는 일 같아서 얼마나 애처롭고 가여운지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지나가면 아침이 오듯 산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지고, 죽음이란 현실 밖, 또 다른 삶의 한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일 뿐이라고 부단히 자신을 달래면서 인내하였다.
아직 어리지만 눈치가 마알간 아이들도 엄마 아빠 사이의 냉기류를 체감한 것인지 눈에 띄게 풀이 죽고 불행해 보였다. 좋아하는 쵸콜릿을 주어도 그걸 손에 쥐고만 있지 입으로 가져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웃음기가 가신 침울한 모습이 얼마나 가슴을 찢는지 이래저래 난 극도의 스트레스로 심신이 만신창이였다.
자신의 일탈을 인정한 이후로 내 일관적인 무시와 무관심에 설자리를 잃어버린 남편 역시 딱하긴 매한가지였다. 허나 그는 화를 자초한 장본인이므로 동정의 여지가 없었지만, 오만가지 궁리를 다 해봐도 아이들에게 있어 어미를 잃는 일이란 치명적인 재난일 것이었다. 모정(母情)이란 아이들 정체성과 기본 인성의 자양분은 물론, 성장촉진제인 데다, 사랑의 손길이 절실한 과정에 있는 아이들에겐 절대적 필수 요건이다. 그렇듯 분명한 사유(事由)를 어미가 외면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니 나는 나대로 간장 썩는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솟았다.
저 자식들을 두고 어찌 갈까, 내 새끼들을 어이 할꼬,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할 일에 애가 말라, 극렬한 통한은 흡사 버얼겋게 단 잉걸불을 심장에다 바로 들이대는 것이나 진배없는 고문과도 같았다. 사흘이 멀다 하고 몸져누울 것만 같은 신체적 징후를 정신력으로 버텼는데 사소하게는 입술이 부르트고 눈병에도 시달렸다.
드나나나 앉으나 서나 자제력도 바닥 나버린 상태에서 한계를 느낀 순간에는, 욕실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이 들을까봐 수건을 입에 문채 주저앉아 흐득흐득 울었다.
그렇듯 절통한 심경에 꺼들리다 보니 사람 진이 있는 대로 다 빠져버렸다.
문제의 발단
" 여보 이게 뭐야? "
오랜만에 귀국 휴가로 집에 온 남편이 몇 일간 서울 본가(本家)를 다녀온 직후였다. 이전에는 식구들이 함께 동반여행을 했었으나 시모(媤母)께서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시기적으로 다소 조심스럽기도 해서 부득이 남편 혼자 다녀 온 직후였다. 헌데 돌아온 그의 여행가방에서 세탁물을 꺼내다가 뜻밖에도 문제의 그흔적을 본 것이었다. 와이셔츠 깃에 묻어있던 선명한 여성용 화운데이션과 입술에 바르는 루즈 자국이었다.
",,, 뭐 말야? "
" 이거,.. 이건 여자들 화장품인데 이런 게 왜 여기 묻어있지?"
남편의 눈을 똑바로 주시하면서 문제의 와이셔츠 깃을 들이대고 정색하며 물었다.
" 글쎄에... "
순간적으로 남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직감적으로 이건 단순하게 간과해버릴 문제가 아니로구나 싶었다. 그건 분명 원초적 본능이 감지한 동물적인 촉이었다.
저녁에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 둘만 있는 침실에서 다시 물었다.
"여보, 이건 그냥 어물어물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 분명히 하고 싶어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줘. 그럼 나도 최대한 이해하도록 해볼게,.. "
" 뭘? "
" 아까 그 와이셔츠에 묻었던 거 말야....
장담할 순 없지만 짚이는 게 있어 그의 시선을 잡고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 어허, 이 사람이... 멀쩡한 사람 잡놈으로 만들지 말어 ! "
당치도 않다는 듯 그는 의아하리만치 강도 높게 잡아떼었다.
" 그럼 그런 게 왜 당신 옷에 묻은 건지 납득할 수 있게 해명을 좀 해줘봐 ! "
평소 남편은 무슨 일이든 억지로 강행하는 법이 없을 만치 순후하고, 매사 순리를 좇아 일을 해결하는 타입의 신사였다. 그것은 가장 점수를 후하게 줄 수 있는 그만의 긍정적인 일면이자 대표적 트레이드마크(trademark)이기도 하였다.
" 당신 대구에서 이모 잠깐 보고 서울 간댔잖아, 그 일은 어떻게 됐어?! "
그 시절엔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요새같이 실시간 보고나 전달 면에서 용이하지 못했다. 빨간색 공중전화기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집 전화가 다였으니까...
" 응, 처제 만났지 당신이 갖다 주라던 것도 전하고... "
" ... 으음,,, 그러구 나서 ? "
"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 ? "
" 아니, 그러니까 물어보잖아, 당신이 말한 그, 상상이란 건 또 뭘 뜻하는 건데 ? "
" 에잇, 관 두자. !"
예상치 못한 일로 추궁을 당하니까 당황해서 그랬겠지만 그의 감정 표출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꼴이 되었다.
" ...아니, 관두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지? 그러니까, 처제하고 같이 잤단 말을
하기가 좀 곤란하긴 한가보네? "
거침없는 내 넘겨짚기에 그는 대경실색, 질린 얼굴로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실인즉 내 직사포는 근거 없이 대놓고 막 쏘았던 헛 포(砲)가 아니었다. 그동안 애들 이모는 대구에서 직장을 다니느라 주말이나 휴가기간이면 주로 우리 집에
와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천지간에 피를 나눈 동기라곤 저랑 나, 둘 뿐이어서 그건 당연하고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원체 자질이 곱고 성품이 온화한 남편은 평소에도 처제한테 살뜰해서 속으로 그런 점을 참으로 고맙게 여겼었다. 동생도 주저 없이
" 형부 같은 사람 있으면 당장 시집가고 싶다 " 고 할 정도였으니까...
거기까진 괜찮았으나 날이 갈수록 형부를 향한 애들 이모의 관심이 순수하기 보다는 이성을 대하는 것 같아 속으로 쟤가 저러면 안 되는데... 우려되었다. 그때마다 아마 부모사랑에 주린 나머지 형부도 아버지나 오빠처럼 미덥고 좋으니까 그러는 것이려니, 애써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사랑은 주머니 속에 든 송곳 같아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법' 이라더니
사뭇 위태위태한 적신호가 눈에 띌 때마다 적잖이 거슬렸다. 그래도 행여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싶어 매번 나 자신을 단속하기 바빴다. 허나 어떤 식으로든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다 싶어 어느 날 일부러 둘만 있게 두었다가 인기척 없이 불시에 문을 열었더니 지 형부를 끌어안은 동생의, 말보다 분명한 행위를 보고 그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야 너, 말(馬)만한 처녀가 몸을 좀 조신하게 가져야겠다. 남이 보면 형부가
아니라 네 서방 인줄 알겠다. 쯧쯧..."
내처 두면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무안하리만치 핀잔도 주고 가급적이면 둘만 만날 기회를 만들지 않으려고 딴에는 머리를 썼는데 결국 사단이 나고 만 것이었다.
구구한 변명이 없어도 정황이 어떻게 돌아갔겠구나, 하는 어림이 훠언하게 잡혔다. " 여보, 사내가 아무리 잘 나기로 양손에 떡은 가당치도 않아!
어디 놀데가 없어서 처제야 !?..."
조용히 말했으나 지나치게 착 가라앉은 내 말속에서 비수 같은 맹독이 느껴져 스스로도 소름이 돋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남편은 사색이 된 얼굴로 황망히 내 팔을 꽉 붙잡으면서 " 여보 그건 오해야! 맹세코 의도적인 게 아니었어. 어쩌다 그렇게 되고 만 거야. "
실토하였으나 진실이 아닌 것에 단호하고, 불의에는 북극같이 차가운 마누라의 곧은 성정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 ... 내가 잘 못했어, 정말 경솔한 짓이었어, 미안해.
그건 실수였어. 정말이야 ..."
그런 말을 하는 남편이 그렇게 초라하고 역겨워 보일 수가 없었다.
" ...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어, 행동은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건데 그게
안됐다면 당신도 이미 욕망을 가지고 있었단 증거야, 내가 누누이 강조했잖아,
당신이 분명하게 행동해야 한다구,... 어쨌거나 착각하기 딱 좋은 그 모호한
당신 태도가 이런 사단을 자초한 거니까 앞으로 잘해 보슈 "
내 비아냥거림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실 앞에서 남편은 사색이 되었다. 색소가 든 과자는 몸에 해로운 줄 알면서도 먹게 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일까.
소심하고 내성적인 남편의 성격상 먼저 적극성을 띄었을 리는 없다는 심증은 있
었다. 그렇지만 내 극렬한 분노는, 그런데 있는 게 아니었다. 명색이 장부(丈夫)라면 먹을 밥, 못 먹을 밥을 마땅히 가리고 삼가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을, 결과적으로 부화뇌동했다는 사실이 용납할 수 없었다. 도대체 형부란 사람이 처제의 유혹에 동조하고 성적인 속성에 굴복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절망스러운지 속에서 태산 무너지는 소리가 끊임없었다.
세상에 먼저 나와 선(先) 경험한 인생 선배로서, 아니면 형부로서 방정(方正)한 충고가 따라야 마땅할 일에 한심하게도 마주 안고 돌아갔단 사실은 어느 모로 따져도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반듯한 사고와 인격을 갖춘 어른이라면 단연코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남자 같으니 절대로
'초는 양끝을 동시에 켤 수 없다' 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안타까웠다.
" 내가 여태까지 당신을 너무 믿고, 과대평가하고 살았었나 봐 "
내 말의 함의(含意)는 앞으로 진행될 일의 예고편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그동안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 없인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명념, 매사 목마를 때 물 생각나듯 아쉬웠어도 그리움이나 기다림을 나름대로 누리면서 살았다. 외국적 선사(船社)와 계약을 할 경우엔 일 년에 한 번, 휴가기간 외에는 다시 국외로 나가야 하는 취업 조건 때문에 언제나 기다리고 사는 일상을 당연하게 여겼다. 국제 통화나 편지 말미에는 항상 당신이랑 애들이 보고 싶어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빠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릴 위해 그런 걸 다 참고 일 하는구나 싶어 난 매사 성실하고 검소하게 본분을 지켰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의자 위에만 올라가도 벌벌 떠는데 마땅한 일 앞에서는 천정에 매달린 전구도 혼자 갈아 끼우고, 필요하면 망치질이나 톱질도 불사하면서
'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이치를 기꺼이 몸으로 실천하였다. 고액급료자인 가장(家長) 덕분에 중류 이상의 안락한 생활이 가능하였지만 살림을 알뜰하게 잘 하는 일이 보답이라는 소신을 가지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당연히 불만도 없었다.
그런데 남편에 의한 느닷없는 졸지풍파(猝地風波)는 우리 가정의 존폐가 광풍 앞에 비닐우산 젖혀지듯 뒤집히는 대 참사를 일으키고 말았다. 상상도 한번 해본 적이 없었던 청천벽력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인지 입버릇처럼 언니가 부럽다고 말하던 동생한테서도 사흘이 멀다 하고 오던 전화가 뚝 끊어졌다. 아마도 나를 자극하면 안 된다는 싸인이 둘 사이에 오고 간 게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었다.
나로선 더러운 뻘 구덩이에서 함께 뒹구는 짓거리 같아 내처 침묵으로 일관하였지만 속내는 이미 만신창이었다.
그날 이후, 죄인처럼 내 눈치만 살피는 남편의 비굴한 모습도 딱 꼴 보기가 싫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위해선 아쉬운 대로나마 음독 이후를 대비한 비상조치를 해두어야 될 것 같아 도리 없이 남편한테 부탁을 하였다.
" 당신, 이모한테 전화해서 주말에 한 번 다녀가라고 해줘 "
내 심산에는 집구석이 뒤집어져도 이모가 곁에 있으면 불가불 아이들을 보호하고 건사하는 일은 하게 될 것이란 계산을 한 것이었다.
드디어 터졌구나 싶었는지 남편은 세상 끝난 것 같은 얼굴로 애원하였다.
" 여보 내가 빌께, 부탁인데 제발 일 크게 만들지 마 응? 내가 죽일 놈이야,
처제를 설득해야 했었는데 내가 큰 실수를 한 거야, 잘 못했어. "
" 무슨 헛소리야! 이모한테 애들 잠깐 맡기고 난 몇일 바람이나 좀 쐬다
오려는 건데..."
내 의중을 모르는 남편은 내 능청을 액면대로 납득하기가 어렵다는 눈치였으나, 어쩌면 피차 시간적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 보이기도 하였다. " 그래도 괜찮겠어? "
" 소행머리는 패 죽이고 싶어도 어쩌겠어, 내 동생인 걸... "
" 여보 제발 날 용서 좀 해줘라, 아무리 무슨 소릴 다해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뿐야! ...믿어줘, 정말 미안해. "
그러나 한결 같은 내 무반응에 화가 치미는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한순간, 뚱딴지같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뭐라고 큰소리로 욕이라도 좀 해 봐, 이건 아니잖아! 지독한 지집애..."
그야말로 똥 낀 놈이 성을 내었다.
그날 (D- day)
그날 오후, 남편은 모처럼 시내로 외출 중이었고 유치원을 다녀온 아이들은 한결 밝아진 모습으로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날 밤이 내심 정해놓은 어미의 Dㅡ데이 인줄 알 리 없는 아이들은 천지도 모르고 즐거운 얼굴로 놀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날 동안 냉기류가 가득했던 집안에, 가끔 엄마하고 손잡고 춤을 추었던 음악이
훨훨 날 것처럼 가득한 데다 예쁜 옷을 입은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중이었으니 기분 좋은 일이긴 할 터였다.
아이들 기억으론 음악이 있는 우리 집은 즐겁고 행복한 때란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아이들을 위해 분위기 전환이 목적이었던 내 의도적인 연출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나 죽은 뒤 장사(葬事)에 소요되는 일자를 계산하고 그의 출국일자를 꼽아봤을 때 시한이 결코 넉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딴에는 상당히 조급하고 불안하였다. 이래저래 살아서는 마지막이 되는 날 저녁이라,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해 내가 해주고 갈 수 있는 특별 식에 정성을 다하였다.
'살러 가는 년이 물 항아리 채워놓고 간다'는 우리네 속담은 진리였다. 이 짓도 오늘로서 끝이로구나, 내 자식과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생애 최후의 상차림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싸아한 서러움이 해일같이 넘어왔다.
그날 밤,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 양쪽 팔에 하나씩 팔베개를 해주고 누워서 세상을 버리기 전 이승에서의 종말인 사랑을 나누었다. 긴 이별일 것이었다.
" 준이야, 우리 준이는 이 담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
" 응 난 비행기 조종사 ... "
" 그런 민이는? "
"엄마, 난 으음, 국군 대장님 할 꺼다? "
" 우와, 멋지네. 그럼 비행기 조종사나 국군 대장님이 될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
"으음, 그거는 시금치랑 파도 잘 먹고 음, 태권브이가 돼야 돼. 엄마 그치이...?"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레코드에선 바버(String for adagio)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이 방안 가득 향기처럼 흐르고 있었다. 슬플 땐 슬픈 음악이 정서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데다 평소에도 자장가 삼아 시나브로 들려주었던 곡이라, 살아서 마지막으로 자식들과 함께 듣고 싶은 내 의지의 마감 음악이자 위로이기도 하였다..
" 흐으응 엄마 좋다, 난 이상(이 세상)에서 울 엄마가 제엘 좋더라 ! "
" 그래, 엄마두 세상에서 우리 준이랑, 민이 제일 사랑해 알지? "
그러면서 속으로 그랬다. (온 세상을 다 준대도 너희들이랑 안 바꾸지... )
작은 놈이 다리 하나를 어미 배위에다 척 걸쳐놓고 내 뺨이랑 귀를 만지작이며 행복해 하였다. 그런데 큰 아이는 말없이 흐으읍, 하고 숨을 들이키더니 손등으로 가만히 눈물을 훔치는데 순간적으로 간이 철렁 하였다. 그 밤이 세상에서 어미와 함께 누리는 마지막 밤인 것을 알 리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 아이의 느낌은 본능적으로 달랐던 것일까.
"우리 준이는 왜 눈물이 날까 ? "
녀석은 대답 대신 내 목을 끌어안으며
"엄마아... "
"그래 착한 아들, 엄마가 우리 준이랑 민이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는 거 알지? "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울음을 흐드득 삼켰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차오르는 비통함을 꾹꾹 눌러가며 내내 용서를 빌었다. 참으로 모진 짓을 앞둔 이기적인 모정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어미인지라, 미어지고 에이는 비감으로 가슴이 저리고 아팠다. (아들아, 비겁하고 무책임한 이 어미를 용서해다오.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용서해주렴. 사랑해, 너희 모두를 사랑해...)
천지도 모르고 잠이 든 두 아이들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난 빌고 또 빌었다.
(얘들아, 어떻하면 좋으냐, 아아 어떻해, 미안하다... 용서해줘... )
가고 올 줄 모르는 어미를 기다리느라 날마다 저물도록 문밖을 서성이며 지쳐 갈 안쓰러운 내 분신들 생각에, 만약 심장이 헝겊으로 된 것이라면 진즉 너덜너덜 다 헤어지고 철철 삭아 형체도 없어졌을 것이다.
나 같은 어미도 어미라고 태산같이 믿고 천사 같은 얼굴로 잠이 든 내 어린 새 두 마리... 아직 날아오를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한쪽 날개를 베이는 상처라니...
얼마나 애달프고 절통한지, 터진 둑으로 봇물이 범람하듯 슬픔의 격랑이 쉼없이 넘어왔다. 이 세상 어떤 작별보다 처참한 일은 자식을 외면하고 가는 비정한 어미란 자각은 무분별한 동통의 비창(悲愴) 그 자체였다.
아직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얼마나, 얼마나 그립고 사무치는지 운무같이 어리는 설움에 꺼이꺼이 울었다.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아직 어린 내 새끼들이었다. 허나 종당에는 감행해야 할 일이 남은 상태였으므로 눈물어린 마음 가득 아이들 모습을 끌어안고 내 침실 문을 열었을 때, 마침 벽에 걸린 뻐꾸기시계가 22시를 알렸다. 뻐국, 뻐국, 뻐꾹...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를 따라 살아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저 어느 것 하나 그립고, 아쉽고, 아름답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회사 친구들을 좀 만나고 오겠다며 외출한 남편은 아직 귀가 전이었다. 나는, 한차례 더 집안을 두루 꼼꼼하게 살피고 점검하였다. 나 죽은 뒤에 들이닥칠 인척들로부터 여자가 칠칠맞단 소리는 안 들어야지 싶은 염려에서였다. 그런 다음 침상 옆에 끓어 앉아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드렸다. 살아생전 마지막이 될 간절한 기도였다. 비록 성경 구절 하나 똑바로 외우지도 못하는 순 나일론 신자이긴 하였으나 명색이 난 세례 받은 기독교인이었다.
"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의지할 곳 없는 제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어미 잃고 천지가 아득할 어린 것들의 슬픔을 하룻밤 꿈처럼 재워주시고 반듯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유수(流水)같이 쉼 없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그 다음엔, 남편 앞으로 유언이 될 마지막 당부의 말을 몇 자 남겼다.
보소! (여보라고 부르는 것도 싫어서 그렇게 적었다.)
... 이런 식으로 살다 가리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큰소리 칠 일이 아무 것도 없네요.
애처러운 우리 민이, 준이, 내 몫까지 잘 키워달란 바램 간절하고, 다만 믿는 마음 가지고 먼저 갑니다.
생의 마감이 이러할진대 어찌 일말의 유감인들 없을 수가 있으리오.
무책임한 어미지만 오직 한 가지 소망은, 남겨두고 가는 우리 아이들 흠도 티도
없이 잘 키워달란 부탁, 그 뿐입니다.
행여 자고 난 아이들이 어미 찾아 울거든 잠시 먼 데로 볼 일이 있어 갔다 하고
달래주셔요. ........
........................................
편지지 위로 눈물방울이 투둑 투두둑 질서 없이 떨어졌다. 살아있는 동안의 마지막 한 순간이었다. 모든 걸 포기한 상태라서 그런지 아니면 체념 때문이었겠지만 애들 이모인 동생한테는 괘씸하고 더럽다는 감정보다 앞선 생각은, 부디 와서 우리 민이, 준이, 좀 잘 보살펴줬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그러한 심경도 글로써 몇 자 남길까 하다 내키지 않아 그만 두고, 감기약을 챙기듯 준비해 둔 수면제를 손바닥에 한가득 주르르 쏟았다. 때는 1980년 6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꿈인지, 저승인지
끝이 안 보이는 광활한 들판을 내가 허위허위 걸어가고 있었다. 노을이 만연한 황혼의 하늘은 찬연하고 아름다웠다. 마악 넘어간 석양의 잔광으로 산능성이 훠언하게 밝았으며 눈길 닿는 곳마다 작고 예쁜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무슨 일로 나는 그런 곳을 나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흡사 무중력 상태 같았다고나 할까. 그 와중에 무심코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번쩍 그렇게 아이들 생각이 났는데 마치 빛의 에너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 어떡해, 애들이 엄마 없다고 난리가 났을 텐데 싶자 "샛강 물소리 멎을 때 주막집 아낙네 빈대떡 주무르는 바쁜 손길' 만큼이나 마음이 화급해졌다.
빨리 가야해, 어서 가야지, 뇌리에는 오직 그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서둘러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나, 사방을 둘러보는데 마침 저 멀리 강 쪽으로 다리 같아 보이는 물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옳거니, 앞뒤 가릴 사이 없이 난 그곳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하였다. 있는 힘을 다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서 당도해보니 아, 그것은 틀림없는 나무다리였다. 뒤도 볼 것 없이 난 단숨에 그 다리위로 올라섰다.
그때 다리 아래쪽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아낙 한 사람이 날 올려다보면서 참
의아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 이봐요!, 저 위쪽으로 가면 좋은 길이 있는데 왜 하필 이쪽으로 왔어요? "
난 어서 집으로 가야 한다는 일념 밖에 없었으므로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안 될 것 없다면 이 다리를 건너가고 싶다고 말했다.
" 허기사, 건널 수만 있다면야 머... "
뉘앙스가 묘한 아낙네의 말투가 다소 저어하긴 했으나 그 한마디에 난 금방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은 용기가 솟았다. '물에 빠진 놈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으므로 나중에야 어찌되든 일단은 내 의지대로 희망적인 가능성을 부여하였다.
크고, 길고, 넓은 다리 위를 서둘러 달려 나갔다. 그런데 아뿔싸, 다리 전체 3분의 1정도에 해당하는 위치에서 자칫 내려앉기 일보직전인 상태로 다리가 썩어있었다. 덩치는 크고 육중한데 너무나 오래 묵어 낡을 대로 낡아빠진 다리는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당장 우지끈 뚝딱 내려앉아 버릴 것 같이 형편없었다. 낭패도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절망만 하고 있을 촌분의 여유도 내겐 없었다.
내가 처한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대문 앞에서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을 애들 생각에, 속이 타들어갔다. 어떤 무모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기어이 그 다리를 건너야만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궁여지책, 찰나에 생각해 낸 것이 그야말로 뒤로 한껏 물렀다가 육상선수가 달리기 하듯 빠르게 뛴 탄력을 이용해서 힘차게 한번 건너 뛰어보자는 요량이었다. 무모해도 도전 정신만큼은 그랑프리 감이었는데 결과는 아뿔싸, 뛰어넘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여지없이 나는 풍덩,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 엄마아... "
" 엄마아... "
애절하게 날 부르는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두 녀석이 와락 내 가슴위로 엎어지면서 홰 울음을 놓았다. 남편도 거기 있었다. 쑥 들어간 옹이눈을 한 그 초췌한 모습에서 저간의 고초가 어땠는지 단박에 읽혀졌다.
찰나에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이 전류마냥 빠르게 지나갔다. 함께 살았던 인간적인 세월의 두께가 거품은 아닌 것이었던가.
" 엄마, 무서워, 싫어, 인제 고만 자아!"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아이들을 보자 간장이 녹는 듯 무분별한 통증이 싸아아 전율처럼 내창을 훑고 지나갔다.
나중에 들은 소리지만 새벽에 돌아 온 남편이 방안에서 나는 신음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혼수상태였고 입가에는 흰 거품이 보글보글 하더란다.
그렇게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지 즉각 응급실로 옮겨진 것이었고 마침 7일 만에 눈을 뜬 것이라고 하였다.
어리석게도 수면제를 먹으면 자는 듯이 고운 자태로 죽을 것이라 기대했던 내 예상은 얼 척 없는 무지의 소치 그 자체임을 알고 아찔하였다. 엄청난 자괴감이었다. 그랬었구나, 그랬던 것이로구나...
치사량이라고 다량의 수면제를 한 입에 털어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엔 의사의 처방전이 없어도 원하는 전문 의약품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남편의 불륜 사실에 절망하고 참척해서 자살로 응징을 한 것까진 동정의 여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어린 자식한테는 어미로서의 도덕적 의무와 윤리적인 책임을 외면해버린 독하고도 비인간적인 추태란 자성(自省)은 비할 바 없는 죄책감을 동반해 아이들한테 면목이 없었다. 그런 어미를 붙들고 목 놓아 우는 자식들을 보면서 그지없는 통한에 나도 같이 울고 말았다.
자식한테 평생을 두고 갚아도 못 갚고 죽을 빚을 졌다는 자책이 고문 같았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결행하기까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마음고생을 이미 존재세로 바쳤지만 어미란 자가 자식을 팽개치고 차마 못할 일을 저지른 비겁한 현실도피는 어떤 식으로든 변명의 여지가 없어, 상할 대로 상한 속이 헐어빠지는 듯 괴로웠다.
그래, 이제부터 갚으리라, 죽는 날까지 이 빚을 자식에게 갚으면서 살리라 다짐하였다. 그런데 엄연한 것은 온 세상을 다 준대도 안 바꿀 자식이건만 정작 천륜을 외면한 모정이라니 통탄할 일인데도 진실은, 사람이 극에 달하면 자신밖에 안 보이더란 사실을 그때 비로소 알았다. 결론적으로 난 천하에 매정하고 몹쓸 어미였단 그 기억이 지금까지도 죄인 인양 면목 없고 아프다. 지독하게 따가운 동통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무조건적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은 본능적이라서 더
강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가장 근본적이다.'(안양규/붓다,
자기 사랑을 말하다 P101)
이별 준비
열흘 만에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이전 같은 생활일 수는 없었다.
이모한테 연락해서 다녀가라고 했던 내 부탁은 지켜지지 않은 듯 동생이 다녀간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루어 짐작키는 아마도 남편은 내가 혼수상태인 그 1주일간을 애들 데리고 혼자 고스란히 감수한 것 같았다.
평소 내 주관이랄지, 가치관은 그것이 무엇이건 그것다울 때 아름답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항차 그것이 꽃이건, 사람이건 간에
보는 순간 아름답다 느낀다면 그것은, 보고 느낀 대상이 절대 가치적 산물일 때 본능이 먼저 진실에 반응하는 까닭이다. 같은 맥락에서 부부관계에 대한 내 철학이랄지 정립된 사상 역시도 부부는 당연히 부부다워야 한다는 데 있었다.
모름지기 부부란, 미덥기로는 세상에 둘 없는 친구요, 든든하기는 비빌 언덕이며, 사랑하는 것으로 치자면 뿌리 깊은 나무의 과실(果實)과도 같은 사이일 때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 내 신념이었다.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느라 일생을 소처럼 수고하는 사람이 남편일진대 허물없이 한 이불을 덮고 사는 동안엔 언제나 안녕하길 살피고 보필하는 일이 아내의 몫인 줄로 여겼다.
부부가 일심동체라고는 하나 개성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 데서 성장한 이성끼리 만나 사는데, 예별(禮別)없이 제 한 몸만 위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독선일 터, 행여 말 못하는 가슴으로 문풍지의 휘슬 같은 외로움을 혼자 묵묵히 견디는 일은 없는지 살피고 배려하며 사는 일. 그것은 피차 행해야 할 가시버시로서의 도리라는 게 내 굳은 의지이기도 하였다. 그 반석 같은 사랑과 신뢰를 남편은 스스로 엎어버린 망발을 한 것이었으니...
일관된 내 무시와 항의성 침묵으로 남편의 정서가 대단히 불안하고 위축되어 보였다. 나중엔 도저히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 여보, 차라리 내 뺨이라도 한 대 갈겨라 !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니까...
난, 당신이 설마 이 정도로 독한 사람인 줄 몰랐어... 정말 무섭다."
해선 안 될 일에 대한 내 묵언(黙言)성 항의에 그의 원성은 마치 투정하는 아이 같이 유치하였다.
" 그래, 그렇게 독해서 난 길이 아닌 곳으로는 못 가 ! 아니, 절대 안 가 !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
그를 봐도 더 이상 안됐다는 연민조차 없었다. 부부라는 건 반드시 사랑 하나만이 아니라 친구 같이 막역한 정(情)으로도 얽혀 사는 건데, 곁에 있어도 정을 느낄 수가 없다면 그건 부부로선 이미 끝난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위기의식이랄까,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내 모습이 가시권역(可視圈域)을 벗어났다 싶으면 질색하고 찾으면서 울었다. 그래서 화장실에 갈 때
도 미리 아이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득하거나 데리고 움직여야만 조용해졌다.
심지어는 유치원에 가는 것도 마다하고 엄마가 잠만 많이 자서 죽을 뻔 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마치 호위무사처럼 내게서 시선을 거두려 들질 않았다.
그 때문에 밤에도 내가 안고 같이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앉아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도무지 누우려고 하지 않아 딱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이도 어른인 나도 완전한 정서불안에다 트라우마 증후에 노출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찾아야만 하였다.
사는 일
남편의 출국 일자가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비행기 예약시간은 다음 날 19시 30분발 뉴욕 행이었다. 축 처진 모습으로 말없이 가방을 챙기고 있는 남편을 지켜보자니 갈등이 생겼다. 하지만 그래, 이 짓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싶어 군말 않고 짐 싸는 걸 도왔다. 비록 부도덕한 행위를 한 사람일지라도 아이들한텐 둘 없는 존재인지라 다시 귀국하는 날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다 오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당시엔 '에이즈'라는 끔찍한 성병이 심심찮게 뉴스를 타던 무렵이어서, 어떤 이유로든 불치로 알려진 병으로부터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미리 챙겨두었던 소포장 콘돔 한 상자를 그의 옷가방 맨 밑에다 몰래 넣어주었다. 본인이 알면 미안하고 쑥스러울까봐 옷을 꺼낼 때 우연히 발견하고 필요할 때 사용하라는 순수한 취지였고 딴에는 그나마 떠나기 전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인간적인 배려라고 스스로를 부추겼다.
평소 섹스의 정체성에 관한 내 해석은 성생활이 단지 쾌락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주의였다. 절대 난잡해선 곤란하지만 심신이 건강한 상태라면 성인의 섹스는 필요 요소 가운데 중요한 기능의 하나라고 믿었던 까닭이다.
'까마귀라고 하여 모두 오디에 환장 할까' 마는 내 남편을 포함한 남성 기혼자의 경우, 결혼생활을 통해 이미 성을 아는데다 오랜 기간 먼 타국에서의 생활이라면 단발성 일탈이 절대 없다고 장담할 순 없는 일이라는 게 내 소견이었다.
더욱이 나병보다 더 무섭다는 에이즈에 노출이 된 상태에선 조심하고 예방하는 것만이 상책일 터, 만에 하나 보균자가 된 것으로 가정해본다면 본인의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나중에 가족들의 정서나 위생상의 문제 등, 꼼짝없이 모두가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텐데,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였다.
그런 차원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실리가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모르고 속는 것 보다는 차라리 상대의 양심을 믿고 대처할 수 있도록 일깨운다는 취지 측면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내가 무슨 마리아(성모)도 아니면서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유쾌하진 않더라도 그렇게 하는 편이 결과적으로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자신과의 타협인 셈이었다. 믿고 방심했다가 불 난 뒤에 펄쩍펄쩍 뛰기보다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미리 장비를 갖춰두는 편이 보다 현명한 처사라는 측면의 취지였다고나 할까.
예전 같으면 내가 미리 가방을 다 챙겨두고 아이들이랑 가족나들이를 했을 텐데
이래저래 심란해서 잠시 감상에 젖기도 하였다. 그래서 모처럼 속내를 밝혔다.
" 당신 섭섭하겠지만 지금 기분으론 긴말하기 싫으니까 잘 다녀오소,
1년 후에 귀국하면 우리 문제는 그때 풀어도 안 늦을 것 같애. 애들 데리고
잘 지낼 테니까 우리 염려는 말고...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어서 나도 미안해요."
이미 마음의 문이 닫혀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할 말도, 그럴 기분도 아니었지만
잘 다녀오란 내말은 진심이었다. 줄곧 내 눈치만 살피던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 여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당신 믿고 갔다 올 테니까 제발 우리 애들
봐서라도 날 한 번만 용서해 줘라. 나도 내가 한 짓이 정말 끔찍해.
이번에 실감한 건데 당신 그 대쪽 같은 성정이 정말 무섭다 "
남편의 말을 듣고 일순, 동정심이 일어났지만 그뿐, 진즉에 닫혀버린 마음의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출국 당일 날 오후.
아이들 느낌에도 아빠가 무언가 엄마한테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생각이 드는지 눈치를 살피고 서먹해져서 이전처럼 아빠한테 매달리지도 않았다.
남편이 오면 다시 출국하는 날까지 집안에 아이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떠날 날이 없었는데 온종일 시무룩하고 우울한 기색이 역력해서 보는 내내 측은하고 가슴이 쓰렸다.
" 얘들아, 오늘 우리 비행장에 가볼까? 아빠 가신다니까 우리도 같이 가보자 "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온 식구가 함께 승용차에 올랐다.
음독 이후에 몸 상태가 썩 좋은 건 아니었지만 운전을 할 정도는 되는 것 같아 전에 하던 대로 남편을 비행장까지 전송하기로 하였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 양쪽에 아이들을 보듬고 바라보는 남편의 눈동자에 애틋함이 무량으로 배어있었다.
" 준씨, 민씨, 아빠가 다시 집에 오는 날까지 잘 지내고 있어, 너희들은 남자니까 대장부답게 엄마도 잘 지키고 보호할 수 있어야 돼, 할 수 있지? "
말귀를 알아듣는 건지 어떤 건지 시무룩해있던 두 녀석이 제 아빠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일터로 갈 사람은 가고, 나는 나대로 아이들과 함께 성실하게 살았다. 그것은 내 본분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미 산그늘 같은 암영으로 속에 납덩이 하나가 들앉은 것 마냥 마음 한쪽이 늘 무거웠다. 이전의 활력을 되찾기 위한 모종의 돌파구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궁리 끝에 애들이 각각 유치원과 어린이 집을 파하고 오면 형제를 나란히 가까운 태권도장에 보내주고, 나는 나대로 시영(市營) 문화센터로 수영강습을 다녔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조금씩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현업에 복귀한 남편한테서는 각 기항지에서 부치는 항공우편이 자주 왔다.
그 당시 컴퓨터는 한국통신의 하이텔이 한 역할을 하였으나 컴퓨터 보급이 아직 대중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주된 소통 수단이 전화가 아니면 편지가 일반적인 주류였었다.
보내오는 남편의 편지에는 구구절절 자신의 불찰을 반성하고 용서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지만, 난 내키지가 않아 답을 쓰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내가 먼저 편지를 보냈겠지만 배신의 응어리가 암반 같은 상태에선 답장을 쓰려 해도,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설령 쓴다 해도 내 유아(儒雅)한 정서의 샘이 말라버린 후라 쓴 소리나 비난밖에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아예 큰놈 준이한테 바통(baton)을 넘겨버렸다.
" 김 0준! 아빠한테 편지 한번 써볼래? 아빠가 우리 준이 편지 보고 싶다는데
어때? 아무 거나 니가 하고 싶은 말 쓰면 되는 거야. 아마 아빠가 되ㅡ게 좋아 하실껄? 다 쓰고 나면 엄마랑 우체국에 부치러 가자. 쓸 수 있지? "
취학 전이었지만 준이는 한글을 읽고 쓰는데 어려움이 없어 아이를 부추겨서 내 할 일을 열심히 떠넘겼다. 그런데 어느 날 받은 답장 말미에는, 어디서 들은 소린지, 그냥 자기 소린지, 아님 그만치 아쉬워서인지 '여보 영 쓸 말이 없거든 그냥 오동추야 달이 밝아...' 그 유행가 가사라도 좀 적어 보내줘라...'
가식 없는 속내를 느낄 수 있어 편지를 읽으면서 모처럼 웃기도 하였다.
그런 식으로 별 탈 없이, 아이들도 이전 페이스를 찾아가고 나는 그를 보지 않아도 되는 생활이 편하고 좋았다. 의식의 맨 하층에 죽은 듯이 똬리를 틀고 앉은 상처가 무시로 부상(浮上)하긴 하였으나 그것은 아마도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믿었다.
동기간同氣間
어느 날 기대하지도 않은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동안 속에서 치받는 화증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잊으려고 애를 썼는데 어떤 식으로든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할 사안이라 그 문제를 생각하는 자체가 부담인 공황상태에 빠져있었다.
" 오랜만이다 너,..."
" ... 언니야,.. 그동안 면목이 없어서 전화도 못 했는데 내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잘 알고 있다. 뻔뻔하게 느낄까봐 용서 해달란 소리도 못하겠더라... "
고난이 선생이라더니 놀랍게도 안 본 사이에 인성이 많이 성숙해진 듯한 느낌이 말 가운데서 묻어나왔다.
안 그래도 집채 같은 분노에 꺼둘리지 않으려면 그만 두 사람을 용서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어느 한 순간부터 내 뇌리에서 맴돌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갈등으로 차일피일 하는 사이에 세월은 유장한 강물처럼 1년이란 시간을 데리고 흘러가버린 것이었다.
동생은 '눈이 있어도 대상이 없으면 식(識)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불가(佛家)의 말로 제 심경을 토로하고 이제 사문(寺門)에 들면 출가자로서 비구니의 길을 착실히 닦아나갈 것이란 고백을 하였다. 고해성사 같은 동생의 말을 통해 저간(這間)에 자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였다.
속가(俗家)의 인연도 이젠 마지막이로구나, 싶어 며칠 전엔 우리 집 대문 앞까지 왔다가 막상 언니를 볼 용기가 안 나서 벨도 못 누르고 돌아섰다는 말을 할 땐 목소리가 많이 젖어 나왔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울먹이는 그 인생이 하도 가여워 바닷물이 모래사장으로 밀려오듯 내 가슴에도 슬픔이 밀려들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그래서 그랬던가.
" 그래 대단한 결심을 했다. 기왕에 나선 길이거든 그 길에서 네 뜻한바 원을 다 이루거라 널 위해 기도하마. 언니가 언니 노릇을 다 못하니 나도 부끄럽다"
그래놓고 전화기를 사이에 둔 자매가 각각 제 설움에 겨워 숨죽인 채 울었다.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다가 한 숨 돌릴만한 장소에 발가락 끝 하나가 닿은 듯, 묘한 안도감이랄지, 난해한 숙제 한 가지를 풀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도 사람이니 궁극의 해법을 비구니의 길로써 정리하기까지 모르긴 해도 전투 수준의 마음고생이 따랐겠지만 결론적으로 시간 값을 헛되지 않게 운영한 점은 나보다 났다 싶어 기특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당할 일은 단연코 아니었다.
예고된 이혼
내게 1년은 결코 긴 세월이 아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면 지루하겠지만 아직 풀어야 할 난제가 남아있는 상태에선 시간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더니 여축이 없는 시간은 언제 그렇게 다 가버렸는지 남편의 귀국일자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때문에 그가 돌아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관련한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답답하였다.
당일에는 시간에 맞게 차를 가지고 공항으로 가서 그의 큰 가방 두 개를 받아 싣고 같이 집으로 왔다. 안 살 때 안 살더라도 같이 있는 동안엔 잠자리만 빼고는 내 몫의 기본 도리는 전과 같이 할 것이었다. 그래야 유사시엔 나도 할 말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세월과는 상관없이 내 안의 응어리는 도무지 풀릴 기미가 없었다. 때문에 잠자리도 안방은 남편한테, 작은 방은 원래대로 아이들이 쓰고, 나는 오디오 기기가 차지하고 있는 넓은 서재를 고수하였다.
아마도 남편 생각엔 어영부영 시간이 가다 보면 내 오그라든 마음도 다소 흐지부지 되리라 기대한 것 같았지만 도무지 달라질 기미가 없자 어느 날 밤엔 내 방문을 두드렸다. 간이 덜컥했지만 두드리는 소리가 너무 거칠어 열 수가 없었다.
"얘기할 거 있으면 자고 내일 해 "
문을 열어주지 않았더니 잠시 후에 방문을 찍어대는 소리가 났다. 섬뜩하고 무서워서 더구나 열 수가 없었다. 방문을 찍을만한 것으로는 집안에 등산용 도끼가 있었는데 아마도 그걸 동원한성 싶었다. 그 소란에 잠을 깬 아이들이 달려 나와 자지러지게 울면서 제 아빠를 제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 아빠 그러지 마세요 "
" 아빠, 무서워, 엄마아... !"
삼이웃이 깸직한 소란에 기겁을 할 일이었으나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아이들이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울고 매달리는 사이에 도끼질도 멈추었다.
이튿날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놓고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않았다. 모처럼 둘이 마주 앉았으나 기분이 께름칙하고 피차 서먹하였다.
" 난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은데 당신은 어때? "
반드시 결말을 지어야 한다는 각오를 했기 때문에 내가 곰살 맞게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남편이 볼 멘 소리로 불만을 터트렸다.
" 당신은 도대체 내가 얼마나 더 빌길 원해 ? "
"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용서를 빌어야 하는 일 같은 건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했거든. 그래서 말인데 우리 그냥, 이혼하고 피차 맘 편하게 삽시다.
나도 애들 때문에 고민을 참 많이 해 봤는데, 어제 당신이 도끼 들고 설치는
바람에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지 분명해졌어.
이젠 무서워서도 같이 못 살겠어. 게다가 이전엔 당신이 분명 내 남편이었지만 지금은 제부가 돼버린 거잖아. 제부하고 어떻게 한방에서 살아?
눈 질끈 감고 받아들인 데도 그렇게 되면 난 창녀나 다를 게 없는 걸.
당신 생각은 어떤데? "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하는 내 말에 남편은 스스로도 쇼킹했던지 순순히
" 내가 못할 짓을 한건 분명하지만 나로서도 계속 이렇게는 곤란해.
당신 생각이 정 그렇다면 나도 긍정적으로 고민을 좀 해 보지 "
남편 역시 결심한 바가 있었는지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마도 그것은 분명 한 체념일 것이었다.
다음 날 오전.
남편이 어제 말했던 문제를 구체적으로 차분하게 의논 좀 해보자며 먼저 날 불렀다. 밤새 여러모로 고심을 많이 한 듯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어떻게 하는 것이 피차 도움이 되고 항구적인 대안인지 연구해 봤는데
결론은 아무래도 당신 주장대로 하는 편이 좋을 꺼 같애.
체념해 버리니까 차라리 이젠 마음이 편하다"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이, 그것도 정답이란 확신이 있을 경우 번복하지 않는 내 성정을 감안한 듯하였다. 의외로 순순히 결정을 내려준 남편이 사람처럼 보여 고마운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마음으로 꺼들리는 일 없이 두 사람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측면에서도 기뻤다.
원래 인성이 드물게 고운 사람이긴 하였지만 뜻밖에도 근간엔 본 적이 없었던 여유가 그를 훨씬 남자다워 보이게 해주었다.
" 당신, 내가 이혼해주면 애들이랑 어떻게 살래 ? "
" 능력 있는 애비 뒀다 무엇에 쓰게, 위자료 청구는 안 할 테니까 순순히
양육비나 제대로 내 놔! "
그 말에 남편이 씨익 웃으면서
"어이구, 그러면서 뭔 큰소리는 그렇게 치냐 ! 집하고 생활비 줄 테니까 그냥
이대로 맘 편하게 살아. 그게 좋을 거 같다.
애들이야 당신이 어련히 알아서 잘 키울까, 우리 애들 걱정은 안 해.
난 다시 현업에 갈 때까지 오피스텔이나 하나 얻어서 나갈께. 그럼 되겠지?"
"... 애들 교육비, 대학교 입학할 때까지 책임져야 돼!? "
그 말에 남편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날 잠자코 보기만 하였다. 그래서 내친김에 쐐기를 박았다.
" 애들 대학 입학할 때까지 학비랑 지금까지 한 그 말들 전부 문서화해서
싸인 해줘 "
" 누가 지아부지 딸 아니랄까봐 ,.. OK ! 원대로 해주께. 아, 근데
애들이랑 당신 보고 싶으면 한 번씩 찾아와도 되는 거지? 응? "
남편은 내가 짐작했던 것 이상의 휴머니스트(humanist)였다.
" 찾아오긴... 애들은 당신 귀국할 때 한 번씩 데려가서 놀다가 다시 데려다
주면 되겠네. 약속은 서로 지키자고 하는 건데 뒤집거나 잡아떼기 없기다 ... "
그렇게 해서 1981년 10월에 난 정식으로 남편과 협의 이혼을 하였다. 이혼이란 게 사실상 안보고 싶은 일을 안보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란 의미에서 해방감을 느꼈지만, 날이 가면서 아이들은 무시로 제 아버지를 찾았다.
" 엄마, 아빠는 왜 이케 안 와아? ... "
" 아직 크리스마스가 아닌 걸?... "
" 그럼 크리스마스 때는 아빠가 진짜 와아? "
" 그러엄, 아마 우리 준이 로봇트랑 마징가 제트도 사가지고 오실껄?. "
" 아 맞다, 그럼 아빠랑 크리스마스 때 부루 마블 게임 해야지 !... "
그것은 분명 아이의 마음속에 옹달샘처럼 솟아나는 그리움이고 기대일 것이었다.
비록 한 집에 살진 않아도 눈에 안 보이는 책임감이랄까, 그의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아이들은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성장해 주었고 나는 그런 자식들을 곁에서 지켜보고 챙기는 보람으로 성실하게 살았다. 나이가 아깝다거나 사람이 너무 아깝다거나 하면서 친구나 지인들로부터 중매 권유를 수차례 받기도 했었으나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왜냐하면 재혼은 내가 자식을 또 한 번 배신하는 행위란 생각이 굳세었던 까닭이었다. 자식들이 흠도 티도 없이 성장하면서 나는 자식의, 자식은 어미의 버팀목이자 정신적 지주로써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 잘 살았다고 자부한다.
고해성사 같은 마음 자세로 아이들에게 전력투구한 보람이 있어 두 아들이 모두 유수한 학교의 대학원까지 마치고 이제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써 각자 제 역할을 잘 해내는 걸 보면 듬직하다. 무엇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여년 세월 동안 성실하게 아이들을 지원해 준 그 사람의 말없는 응원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약속을 지켜주었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그는 아이들이 모두 일가를 이루고 난 이후, 당시 나이로 70이 내일 모래인 즈음에 황혼의 재혼을 했다고 들었다. 아이들을 통해서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청춘은 갔어도 늦게나마 옆지기를 만났다니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해 준 그의 인간적인 면이 돋보이면서도 좀 안 됐다 싶은 연민에 짜안하였다. 얼마 전, 큰아이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 몇일 전에 아부지 만났는데 그때 말씀이 늬들, 엄마한테 잘 해야 한다. 늬엄마, 겉은 막강해 보이지만 속은 형편없이 여린 데가 있는 사람이다.
서른셋 꽃다운 청춘에 칠십이 넘도록 늬들만 바라보고 살았으니 얼마나 장하고도 고마운 사람이냐 명심해라. " 그러더라길래 그냥 웃었다.
미루어 짐작키로는 그의 재혼이 늦어진 까닭이 어쩌면 재혼하면 내자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했거나, 혹은 자식들을 위한 나름의 희생이었지 싶기도 한데, 이건 내가 잠시 해본 생각일 뿐, 진짜 속내는 모르겠다.
사선(斜線)에서
가만히 짚어보니 결코 짧지 않은 인생여정이었다. 돌아보면 안타까운 소회나 아쉬움인들 어찌 없을까만 대저 행복한 삶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 안에 기쁘고 즐거운일만 가득한 것이랴, 또 불행하다고 해서 반드시 괴롭고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다 내 할 탓이고, 생각할 나름이고, 이해할 탓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사 융통성을 발휘해서 포용할 일이었다.
여자로서의 삶은 일찌거니 포기했으나 어미로서 자식들을 위해 진리를 척도로 삼고 가치 있는 삶을 구가하느라 전력투구한 내 뚝심에 자긍심을 느낀다. 어떤 이유로든 한 순간 자식을 배반(?)했던 과거사에 아쉬움은 있을망정 살면서 갚으리라 다짐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견지에서 스스로 대견하기까지 하다.
눈물 같은 허물의 때를 지양하고 참살이를 위한 일에 마음이 바빠서 실인즉 옆 돌아다 볼 여유 없이 살았다. 매사가 오직 자식들 위주의 삶이었고 또 최선을 다하는 생활이었던 만큼 그런 어미를 자랑스러워하는 자식들의 효성으로 황혼이 정녕 행복하다.
흔히들 인생 100년이 하루살이 같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더구나 시간을 허투루 쓰는 일은 없는지 살피고 금쪽 같이 아껴가며 운용할 일이다. 내게 남은 유통기한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서부터 인제는 잘 죽을 수 있는 일에 차근차근 준비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 나아가서 사람답고 더욱 겸손하게 살다 가리란 각오 또한 새롭게 다지곤 한다. 찬송가 제목마냥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 초라하지만 진정 어디에나 필요하고 의미 있는 귀한 목숨 값 하면서 살다가 가고 싶다.
길고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까닭은 봄 햇살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고있기 때문이다. 근자에는 살아있음에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아침이면 제일 먼저 창을 열고 동산 숲을 건너다본다. 장림(長林) 나무들의 기상이 얼마나 푸르고 청정한지 내 인생 여정을 나무에 대비해 보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매번 음미해 보게 되는 말이 있다. '인생의 황금시대는 늙어가는 장래에 있는 것이지 지나간 젊은 날의 무지에 있지 않다'는 임어당의 말이다. 여하튼 시간은,.. 세월은, 매사에 다시 없이 훌륭한 내 스승이었다.
ㅡ끝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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