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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부] 망조(亡兆)든 미국

이대현 논설위원
이대현 논설위원

로마의 첫 통치자 로물루스는 첫 전쟁을 사비니와 치렀다. 승리한 로물루스의 결정은 뜻밖이었다. 승자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사비니에 로마와 동등하게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로물루스와 사비니 왕 타티우스는 공동으로 왕이 됐고 두 부족은 권력을 나눠 가졌다. 세계제국 로마는 패자까지 품은 관용(寬容)에서 싹이 텄다.

인류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보편제국'을 이룬 로마의 힘은 관용 한 단어로 집약할 수 있다. 로마제국 설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통치 방침을 관용이라고 선언했다. 갈리아족, 유대인 등 로마는 이민족들의 다양성을 존중했고 그들에게 시민권을 줬다. 관용을 바탕으로 민족, 문화, 종교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질성을 극복해 제국을 만들었다.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아 로마에 자주 비견되는 것이 미국이다. 실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로마 공화정은 이상적 통치 체제였다. 대통령과 의회, 법원이 권력을 나눠 갖는 체제는 로마를 모델로 했다. 다양한 이민족을 포용해 '팍스 아메리카'를 만든 것 역시 로마를 빼닮았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던 30대 후반의 한국계 외교관이 자괴감을 견딜 수 없다며 사표를 던졌다. 트럼프 행정부의 인종주의, 여성 혐오 등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는 게 외교관을 그만둔 이유다. 관용을 비롯해 자유, 공정 등 미국적 가치를 확산하려고 외교관으로 열심히 일했는데 이런 가치들이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에 나설 때 트럼프의 참모습을 알아봤어야 했다. 급기야 적도 아닌 동맹국에까지 폭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임대아파트에서 114달러를 받는 것보다 한국에서 10억달러를 받는 게 더 쉬웠다"고 한국을 조롱·폄훼하고 문재인 대통령 말투를 흉내 내며 희화화했다. 품격·관용은 차치하고 동맹국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찾아볼 수 없다. 관용은 사라지고 원주민들을 축출하고 아프리카인 노예로 부를 쌓은 초기의 '야만 미국'으로 퇴보하는 모습을 트럼프에게서 볼 수 있다. 미국도 망조(亡兆)가 단단히 들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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