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명화 속 숨은 이야기 <18> 예술의 기원

라스코 동굴,
라스코 동굴, '누워있는 남자'

누워있는 남자, 라스코 동굴 벽화 중 한 부분, 기원전 18,000~15,000년,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베제르 계곡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는 신비에 쌓인 예술의 기원을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 현 인류의 직계 조상인 크로마뇽인들이 남긴 동굴벽화는 '프랑코-캉타브르'(Franco-Cantabre)로 불리는 프랑스 남서부에서 스페인 북부에 연결되는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프랑스 도르도뉴도(道) 베제르 계곡을 따라 페쉬-메를르, 트롸프레르, 라스코 등 여러 동굴이 분포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작품의 규모나 수, 예술적 가치에서 라스코 동굴이 으뜸이다.

이곳은 참으로 우연히 발견되었다. 1940년 9월 8일, 몽티냑 마을의 17세 소년 마르셀 라비다는 세 친구와 함께 언덕을 산책하던 중 반려견 로보가 쫓던 산토끼가 땅에 난 구멍으로 쑥 빠지는 걸 목격한다. 지름 20cm 정도의 구멍은 의외로 깊었다. 마르셀은 나흘 후 다른 친구 셋을 대동해서 다시 그곳을 찾는다. 집에서 챙겨온 석유램프로 어둠을 밝히고 부엌칼로 점점 땅을 팔수록 통로가 넓어지면서 마침내 소년들은 동굴을 발견한다. 매몰되어 있던 예술의 시작을 알 수 있는 증거가 장구한 세월을 거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9월 21일,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달려온 저명한 선사학자 앙리 브뢰이 신부는 수소와 암소, 야생말, 코뿔소, 순록, 곰, 표범 등 다른 동굴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종류의 동물 그림에도 놀랐지만, 선사 예술가들의 동물 형태를 포착해내는 탁월한 능력과 표현방식에 경탄했다. 뒷발을 치켜들고 앞을 향해 질주하는 동물들의 역동성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점이다. 그는 사망하기 직전까지 동굴 구조를 분석하고 이미지들 하나하나를 분류해서 도상학적 해석뿐만 아니라 상징체계를 세우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1953년에 개발된 방사선 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해 라스코 동굴의 벽화는 기원전 1만8천~1만5천 년 사이, 즉 막달레나기에 그려졌음이 밝혀졌다.

브뢰이 신부는 빙하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먹이인 수렵이 잘 되길 기원하는 의미로 동물 그림을 그렸다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 동굴 일대에는 그림에 그려진 동물들이 실제로는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 다른 선사학자들은 동굴벽화가 그려진 동굴은 생활의 터가 아니고 토템과 연결된 성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누워있는 남자'로 불리는 이 작품은 손의 음각이나 동물, 추상적인 기호들이 대부분인 동굴벽화에서 사람이 등장한 매우 이례적인 예이다. 양팔을 벌린 채 누운 남자의 머리는 새처럼 보이고 발기된 생식기가 인상적이다. 우측의 화살을 맞은 야생 수소(bison)는 배가 갈라져 내장의 일부가 빠져나온 상태로 보인다. 온통 삐죽삐죽 쏟은 털과 부릅뜬 눈은 수소의 단말마적인 고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남자의 하단에도 화살처럼 보이는 선이 그어져 있다. 좌측에는 코뿔소가 보이는데, 치켜든 꼬리 아래 마치 비가 내리는 듯 사선으로 점들이 표시되어 있다. 학자들마다 다양한 가설을 내세우지만, 한마디로 이 그림은 수수께끼다. 수소는 주술적 의식의 제물일 수도 있다. 솟을대에 앉은 새는 구석기 씨족집단에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영적 매개 토템이었고, 새 가면을 쓴 남자는 특정한 의식을 주관하는 샤먼일 수도 있다.

1947년부터 일반인들의 입장이 허용되자 하루에 천 명씩 라스코 동굴을 찾았다. 사람들이 내뿜은 이산화탄소로 동굴 여기저기서 박테리아가 번지고 훼손이 시작되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당시 프랑스 문화상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1963년에 라스코 동굴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문화대국인 프랑스답게 적극적인 기업 메세나와 정부의 지원으로 오랜 공사기간을 거쳐 200m 떨어진 곳에 '라스코 2'를 만들어 1983년에 오픈했다. '수소의 방'으로 불리는 구역 일대의 동굴 구조를 똑같이 재현하고 안료나 목탄 등 그림의 재료 또한 원래와 동일한 것을 사용했다. 2012년에는 '라스코2'가 재현하지 않는 다른 구역을 같은 방식으로 재현한 '라스코3'을, 2017년에는 오리지널 라스코 동굴 구조를 총체적으로 재현한 '라스코4'도 오픈했다. '라스코4'는 관객들이 VR과 AR을 통해 구석기 문화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만드는 시스템과, 선사학자를 비롯해 조형예술가, 건축가, 지질학자, 생태학자 등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학제간 연구를 진행하는 '몽티냑 선사예술연구소'도 포함하고 있다. 최근엔 이 세 군데 라스코 동굴 투어 관광프로그램이 상품화되어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도르도뉴도 전체의 경제가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박소영(전시기획자, PK Art & Medi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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