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제 칼럼] 연구개발과 제품 상용화 사이에는 죽음의 계곡 있다

정우창 대구가톨릭대학교 기계자동차공학부 교수(KAIST 공학박사)

정우창 대구가톨릭대 교수
정우창 대구가톨릭대 교수

실험실 연구 결과가 상업화되려면

스케일업이라는 험난한 과정 거쳐

고난도 소재·부품·장비 기술 국산화

긴 안목 갖고 기초부터 튼튼히 해야

필자의 전공은 재료공학이다. 재료가 이처럼 세상의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최근 가장 관심을 끄는 단어가 일본 경제보복 중심에 있는 소재·부품·장비이기 때문이다.

밥(부품) 맛(성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쌀(소재)과 전기밥솥(장비)이다. 쌀 품질이 나쁘고 전기밥솥 성능이 시원찮으면 밥맛은 좋을 수가 없다.

주부들에게 인기 있는 IH(유도가열) 압력밥솥은 높은 압력 덕분에 조리 시간이 단축되고 무쇠 가마솥처럼 솥 전체가 골고루 가열되므로 밥이 찰지고 맛있게 된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가마솥에서 찰지고 구수한 밥을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전기밥솥 역할을 하셨던 것이다.

맛 좋은 밥 생산은 세계 1등인데 쌀과 전기밥솥을 수입해야 하는 작금의 상황이 우리의 소재∙부품∙장비 상황이다. 쌀이 바뀌면 물 양, 가열 방법, 뜸 들이는 시간 등 방법(부품 제조 조건)도 달라진다. 첨단 전자제품은 소재나 장비의 작은 조건 하나가 바뀌어도 품질 불량으로 응답한다.

정부는 앞으로 7년간 매년 1조원씩 총 7조8천억원을 연구개발에 투입하고 각종 환경∙노동 규제를 풀어 탈(脫)일본에 속도를 내겠다고 발표했다. 극일을 위한 첨단소재 개발 과정을 온몸으로 경험해 본 필자로서는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고 규제만 풀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정부 시각에 공감할 수가 없다. 유사한 일이 10년 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2010년부터 올해까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연구개발 사업인 WPM(World Premier Materials) 사업에 약 1조원을 투자했다. 세계시장 매출 10억달러, 점유율 30% 이상을 목표로 10개의 핵심 소재를 개발하는 사업이었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에 따르면 야심 차게 시작한 이 사업이 마무리 단계인 지금 양산 체제를 갖춘 건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개발이 포함된 플렉시블 디스플레이용 플라스틱 기판 소재, 고에너지 2차전지용 전극 사업 등 2개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수입 중 일본산이 93.7%에 이르러 개발했다고 보기도 힘든 상황이다. 전자공학도 출신의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연구개발과 제품 상용화 사이에는 죽음의 계곡이 있다고 했다. 실험실 연구 결과가 상업화로 이어지려면 스케일업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난도가 높은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기술을 국산화하기 위해서는 긴 안목을 갖고 기초부터 튼튼히 해야 한다. 시작은 우리 교육과 연구개발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물리, 화학 등 기초과학을 소홀히 생각하는 교육 환경과 산업화 연구는 제쳐 놓고 논문 쓰기에만 열중하는 대학의 연구 풍토부터 바꾸어야 한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 KAIST, 서울대 등 대학들이 기술자문단을 꾸려 대응하고 있으나 산업화 기술을 모르니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올해 우리나라 국가 R&D 예산 20조5천억원의 약 40%를 사용하는 정부 출연 연구원의 산업화 기여도는 매우 낮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기 위해 전국 대학이 자문단을 꾸리고 있으나 엄청난 국가 예산을 사용하는 정부 출연 연구원은 조용하기만 하다. 독일의 프라운호프 연구소처럼 산업체가 필요로 하는 실용 기술 개발 능력을 갖춰 산업체를 리드해 갈 수 있도록 연구 환경을 변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술 관료들이 정부와 지방 부처에 많이 들어갈 수 있도록 패러다임도 바꿔야 한다. 중국의 행정구역인 성(省)의 성장들 중에는 공대를 나온 테크노 관료들이 많다고 한다. 공학박사도 수두룩해 기업 CEO보다 기술을 훨씬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성장들은 기술을 알고 행정력까지 갖췄으니 천하무적인 셈이다.

우리나라 장·차관과 수석비서관, 지방자치단체장 중에 이런 관료들이 얼마나 될까. 새로운 재료는 새로운 산업을 창조한다. 지금은 위기이지만 잘 준비하면 소재 강국 대한민국으로 나아갈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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