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규제를 둘러싼 한·일 간 갈등이 장기화될 조짐이다. 대법원의 강제 징용 판결에 아베 정권이 수출 규제 조치로 대응하는 것은 치졸하기 짝이 없는 행태다. 과거사를 둘러싼 분쟁을 무역과 연결한 조치는 일본이 절대 일류 국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장기적으로 소재, 부품, 장비 분야에서 일본 의존도를 줄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시점에서 일본의 수출 규제 직전 상황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대법원 판결 이후 8개월 동안 무대책으로 일관했다. 신일철주금(과거 신일본제철)이 일본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을 지급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것은 지난해 10월 30일이다. 일본 정부는 즉각 항의했다. 그로부터 8개월 뒤인 지난 7월 1일, 일본은 반도체 소재·부품 3개 품목 수출 제한을 발표했고 한달 뒤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 명단에서 제외했다.
8개월 동안 일본의 경제 보복 가능성이 줄곧 예고됐다. 많은 일본 전문가들이 아베 정권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경고했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가 지난 3월 "한국에 대한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했고 100여 개의 제재안을 마련했다는 현지 언론 보도도 나왔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최종안은 5월 중에 대부분 완성됐다"고 보도했다.
한·일 경제 전문가인 박상준 일본 와세다대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올해 상반기 내내 소문이 무성했다. 일본 정부와 일을 하는 동료 교수들로부터 '관료들이 한국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벼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일본 주재 한국 기자들이 어떤 품목으로 보복할 것 같으냐고 물어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국내 언론도 '정부가 대일 외교를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을 수없이 했다.
돌이켜보면 위험 신호가 곳곳에서 울렸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청와대, 여당, 외교부가 일본의 동향을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고도 무시했다면 직무유기다. 일본 주재 한국 대사관은 현지 분위기를 어떻게 보고 했나? 보고를 했다면 여권의 어느 선까지 올라갔나? 정상적인 정부라면 8개월간 다양한 시나리오를 두고 대비책을 만들어야 했다.
정부는 지난 6월 말 일본 언론들이 보복 조치 예고 기사를 내놓을 때까지도 전혀 예상을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최소한 그간의 경과를 설명하고 정부 대책을 차분하게 설명해 국민을 안심시키는 자세로 나왔어야 했다.
세간에는 일본의 도발을 정부가 방조한 것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오고 있다. 야권에서 "그동안의 태만이 의도된 것이라면 묵과할 수 없다"고 지적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일본과 갈등이 내년 총선에 유리하다는 보고서를 만든 여당의 행태로 볼 때 여러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정기국회 국정감사에서라도 정부의 8개월간 행적이 드러나길 기대한다. 정부를 믿고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동참하는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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