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병주교수의 역사와의 대화] 15세기 대일 외교 지침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15세기에 일본의 호전성 간파, 대응 제시한 ‘해동제국기’
강성으로 치닫는 한일 관계... '해동제국기'의 의미 생각해 봤으면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그들의 습성은 강하고 사나우며, 무술에 정련하고 배 타기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게 되었으니, 그들을 만약 도리대로 잘 어루만져 주면 예절을 차려 조빙(朝聘)하고 그렇지 않으면 문득 함부로 노략질하였던 것입니다.'

위의 글은 신숙주(申叔舟·1417~1475)가 세종 때 일본을 다녀온 후, 성종의 명으로 1471년(성종 2년)에 완성한 '해동제국기'의 내용 중 일부이다. 600년 전을 살아간 학자의 저술이지만 최근의 한일 관계에 비추어 보아도 그 맥락은 놀랍게도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해동제국기'는 당시만 해도 거의 교류가 없던 일본을 직접 답사하고 그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여 조선시대 대일 외교의 지침서 역할을 했다.

1443년(세종 25년) 신숙주는 세종의 명을 받들어 일본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직책은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정사와 부사에 이어 서열 3위에 해당한다. 서장관은 외교는 물론, 특히 문장에 뛰어난 사람이 임명되는 직책으로 세종은 신숙주에게 큰 믿음을 보였다.

'해동제국기' 서문에서 신숙주는 '대체로 이웃나라와 사귀어서 사신이 왕래하고, 풍속이 다른 사람들을 어루만져서 반드시 그들의 형편을 알아야 합니다.… 신은 명을 받들어 옛 전적을 상고하고, 보고 들은 것을 참작하여 그 지형을 그림으로 그리고 왕실의 세계(世系)와 풍토 및 숭상하는 것들을 대강 서술하고, 응접하는 세목에 이르기까지 편집하여 책으로 만들어 바칩니다'라고 하여 책을 편찬한 경위를 설명했다.

'해동제국기'는 서문과 함께 7장의 지도, '일본국기'(日本國紀), '유구국기'(琉球國紀), '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국기' 편에서는 일본의 풍속에 관한 내용들이 주목된다.

'무기는 창과 칼 쓰기를 좋아한다.…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은 없다. 남자는 머리털을 짤막하게 자르고 묶었으며, 사람마다 단검을 차고 다닌다. 부인은 눈썹을 뽑고 이마에 눈썹을 그렸으며, 등에 머리털을 드리우고 다리로써 이어 그 길이가 땅에까지 닿는다. 남녀가 얼굴을 꾸미는 자는 모두 그 치아를 검게 물들였다.… 사람마다 차 마시기를 좋아하므로 길가에 다점(茶店)을 두어 차를 팔게 한다.… 오직 승려만이 경서를 읽고 한자를 안다. 남녀의 의복은 모두 아롱진 무늬로 물들이며 푸른 바탕에 흰 무늬다. 남자의 상의는 무릎까지 내려오고 하의는 길어서 땅에 끌린다'와 같은 내용들로서 일본의 풍속을 객관적으로 서술하였다.

사무라이 전통, 젓가락 문화, 차를 즐기는 풍속 등은 15세기 일본에도 유행했음이 나타난다. '해동제국기'는 편찬된 이후 외교 협상에서 자주 활용되었으며 후대의 학자들도 그 가치를 거듭 언급했다.

16세기의 학자 김휴는 "우리나라의 외교 규범에 있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 이수광이나 이익과 같은 실학자들도 그들의 저술에서 '해동제국기'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 보인다.

신숙주는 '해동제국기'를 통해서 일본에 대한 경계와 함께 교린 외교의 중요성을 곳곳에서 피력하였으며 미구에 발생할지 모를 전란을 막기 위해서는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을 우선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적(夷狄)을 대하는 방법은 밖으로의 정벌에 있지 않고 내치(內治)에 있으며, 변방의 방어에 있지 않고 조정에 있으며, 전쟁에 있지 않고 기강을 진작하는 데 있다"고 피력한 것에는 외환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부 안정의 필요성을 중시한 신숙주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최근 한일 관계가 강성으로 치닫고 있다. 15세기에 이미 일본의 호전성을 간파하고 이에 대한 대응을 제시한 '해동제국기'의 기록이 던져 주는 의미들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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