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른 아침에] 순종어가길, 결단이 필요하다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공동대표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달성공원 정문 '순종 황제 동상'

이토에 끌려다닌 굴종의 상징

철거 요구에 중구청 반대하지만

'다크투어리즘' 아닌 '다크'할 뿐

달성공원 하면 '달성공원 앞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세상 느긋한 표정으로 쪼그려 앉은 어르신들, 담벼락 따라 길게 늘어선 노점들, 찻길을 꺾어 들면 금세 색다른 공간을 만나게 된다. 어떤 이에겐 키다리 아저씨의 추억으로, 또 어떤 이에겐 여름날 사 먹던 냉차로 기억되는 그곳, 그 안에 서면 시간이 살짝 느리게 흐른다. 코끝에 잦아들던 공기도 슬며시 나른하고 잔잔해진다. 알고 보면 일제의 신사가 들어섰다 쫓겨난 곳, 돌문도 세워졌다 무너진 곳, 달성공원은 지난 시대의 요동과 아픔을 고스란히 겪어낸 곳이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공원 밖 담장 아래가 더 평화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느긋하게 펼쳐진 진입로가 오히려 더 공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게 한꺼번에 옛일이 되었다. 중구청의 각별한 노력으로 '달성공원 앞'의 고유했던 장소성이 그예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게 2017년 5월, 순종 황제의 동상이 들어서고 나서였다. 예의 '달성공원 앞길'이 더는 느긋하지도 잔잔하지도 않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이 구역의 주인공이었던 달성공원 정문도 저 멀리 동상의 배경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이제 '달성공원 앞'은 커다란 금빛 동상이 홀로 위용을 뽐내고 바닥엔 담배꽁초와 쓰레기가 널브러진, 희한한 방식으로 버려진 길이 되었다.

사람과 자동차 모두가 외면하는 좁고 불편한 길, 중구청이 70여억원의 돈과 4년여의 시간을 투자해 추진한 '순종황제어가길 조성 사업'의 성과가 이렇게 마무리된 셈이다. 사실,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다. 이 사업엔 의구심을 품거나 반대한 사람이 시작 전부터 많았다. '어가길'이라기보단 순종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끌려다닌 '굴종의 길'일진대 굳이 복원할 필요가 있느냐는 물음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일장 연설과 그에 대한 만세 삼창으로 채워진 황제의 순행(巡幸)인 터라 자칫 '이토 히로부미의 길'이 될지 모른다는 지적도 있었다. 여기에 대한 중구청의 답은 간단했다. 이른바 '다크투어리즘'이라는 거였다. 순종황제어가길에 숨겨진 구국 정신을 다크투어리즘으로 승화(?)시켜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동시에 주변 상권도 활성화시킬 것이라 했다.

하지만 5.5미터 높이의 동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거기에 '먼 곳을 응시하는 순종이 백성들에게 희망의 다리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표현했다'는 설명이 더해지자 여기저기서 역사 왜곡이라는 항의가 잇달았다. 당장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도 거세게 일었다. 이에 대한 중구청의 답은 전과 같았다. '다크투어리즘'이라는 거였다. 순간, "서양의 것이라면 양잿물도 마시려 들겠다"며 혀를 끌끌 차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려 '구국 정신'이 승화되어 '다크투어리즘'이 된다니?

'다크투어리즘'은 그처럼 숭고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슨 신기술도 아니며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기에도 부족한 그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 기를 쓰고 조성하거나 육성해야 할 만큼 엄청나게 좋은 그 '무엇'이 아니란 이야기다. 그래서 난 이런 건 '다크투어리즘'이 아니라고 지면에 썼다. 하늘을 난다고 다 비행기가 아니듯 말이다. 약간의 역사성에 교훈을 쥐어짠다고, 거기에 적당량의 슬픔과 우울을 버무린다고 다크투어리즘이 될 것 같으면 월요일 출근길도 '다크투어리즘'이 될 판이기 때문이었다. 중구청은 역시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달부턴 순종황제어가길 동상이 전국 뉴스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근 한일 관계의 이상 기류를 타고 친일 역사 왜곡의 사례로 언론이 집중 조명한 까닭이다. 대구 달성공원이 엉뚱한 이유로 유명세를 타게 된 셈이다.

화가 난 시민들이 '국채보상운동의 도시 대구'에 있어서는 안 될 조형물이라며 다시 한 번 철거를 요구했다. 이번에도 중구청은 '다크투어리즘'이라는 취지를 봐 달라고 했다. 뉘앙스도 같았다. 어디까지나 '다크투어리즘'이라는 수준 높은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도가 낮아서 발생한 소동이었다. 답답해진 시민들이 정 그렇다면 달성공원 안이나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했다. 중구청의 답은 같았다. '그래도 다크투어리즘'이었다.

시민을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이쯤 되면 차라리 고백을 하는 게 맞다. 국비와 시비를 받아 쓴 탓에 입장이 난처하다고. 하지만 방법을 찾겠다고 말하는 게 맞다. 동상 하나가 시민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다. 이제 그만 좀 하자. '순종황제어가길'은 '다크투어리즘'이 아니라 그냥 '다크'할 뿐이다. 중구청의 결단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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