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연구개발)와 제품 상용화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높은 장벽이 있다. 소위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라고 부른다. 원천 기술을 확보하고 시제품 몇 개를 개발하는 것과 이를 시장에 선보이고 이윤을 내기까지는 큰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기업이 전문 인력을 고용하여 기술 개발에는 성공하지만, 자금 조달 등의 어려움으로 개발한 기술을 사업화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도산하는 것이다.
요즘처럼 소비자의 요구가 온라인을 통해서 즉각 반영되고 작은 품질의 차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대에 어설픈 기술 개발은 설자리가 없다. 특히 전자 통신 분야에서 소재와 부품은 신뢰성이 생명이기 때문에 쉽사리 거래처를 바꾸기도 어렵다. 갈수록 골이 깊어가는 한일 갈등 때문에 반도체 분야를 필두로 하여 부품과 소재를 국산화하자는 움직임이 강하다. 특히 일본에 대한 기술 의존도가 생각보다 높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불안감뿐만 아니라 실망감이 크다고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카이스트와 서울대 공대 등 주요 대학들이 기술자문단을 꾸려서 중소기업에 자문을 해주기로 한 것이다. 카이스트 기술자문단(KAMP)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의 문의 전화가 쇄도한다고 한다. 대학의 우수한 연구 인력이 중소기업의 연구개발에 집중되고, 정부의 정책 자금이 제품의 시장성 확보, 해외 특허, 마케팅 쪽을 균형 있게 지원해준다면 비용 부담으로 인해 도산하는 기업은 줄어들 것이다. 또한 소재와 부품을 모두 국산화하겠다고 욕심내기보다는 다른 나라의 중소기업들과의 세계 분업화를 통해서 효율과 이윤을 극대화해야 한다. 오랜 기술의 축적과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한 문제를 단시일에 해결하도록 다그친다면 곤란하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원로 엔지니어나 퇴직한 경영인도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는 일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요즘 '죽음의 계곡'이라는 용어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사장이 지난 8월 15일 일본의 한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 내용이 주목을 끌면서부터다. 소재 국산화가 단기간에 가능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국산화는 기업이 스스로 판단해서 진행해야 한다는 것과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나설 수 있는 중장기적인 대책과 환경을 정부에서 만들어 주라는 것이다. 한일 사태를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에는 엔지니어 출신의 CEO가 가진 차가운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이 녹아 있었다. 일본과의 갈등 문제를 외교적으로 조속히 잘 매듭짓고 국내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인 윤종용 전 부사장은 끊임없는 기술혁신으로 초일류 기술 강국을 꿈꾸며 자신이 몸담고 있던 기업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한국의 대표적인 CEO다. 그는 1995년 말 삼성 일본 본사 사장으로 밀려나면서도 오히려 일본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IMF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을 때 삼성전자 총괄사장으로 복귀하면서 혁신을 주도하고 기업을 바꿔나갔다. 그에게는 외환위기뿐만 아니라 '죽음의 계곡'을 수차례 넘어섰던 경험이 있다. 이러한 원로 기업인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죽음의 계곡'을 함께 건널 수 있는 자신감이 될 것이다. 또한 기술을 가진 회사가 어려움에 빠지더라도 회생할 수 있는 제도적인 뒷받침과 믿고 기다릴 줄 아는 공감대가 있을 때 핵심 소재 국산화도 이루고 세계 분업화의 흐름도 주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DGIST 에너지공학전공 교수'(사)초일류달성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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