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순서〉
〈1〉 경술국치, 안동인들의 자정순국과 선택
〈2〉 안동·안동인, 만주 항일의 중심에 서다
〈3〉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년, 안동인들의 활동
〈4〉 임청각, 바로잡는 민족정기
〈5·끝〉 임청각, 되찾아야 할 역사

대한독립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경북 안동 법흥동 '임청각'(臨淸閣·보물 제182호)이 원래 모습을 찾기 위한 복원사업에 들어갔지만 아직 제자리를 잡기 위한 역사적 책무가 남았다.
임청각은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이 만주 독립운동 과정에서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팔았다가 문중 차원에서 되찾고, 다시 문중 재산으로 되돌려놓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은 마쳤다.
하지만 아직 임청각은 '미등기' 상태의 주인없는 집으로 방치돼 있는 데다 독립운동가 10명의 배출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석주 선생에 대한 서훈 등급 상향 문제도 남은 숙제다.

◆임청각 매매계약서의 발견·의미
2015년 12월 매일신문은 최초로 석주 선생이 항일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자신의 생가인 안동 법흥동 '임청각'을 팔았다는 구전을 뒷받침하는 '매매계약서'를 입수해 보도했다. 전 재산을 나라 살리는 데 바친 석주 선생의 애국정신이 문서로 확인시킨 것이다.
당시 고성 이씨 문중 후손인 이재업 경북유교문화원 원장은 한국국학진흥원 임노직 유교문화박물관장(당시 목판연구소장)에 의뢰, 자신의 집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고문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임청각 매매 관련 고문서 2장을 발견, 매일신문에 공개했다.
1913년 4월 1일 작성된 '계약서'와 같은 해 5월 21일에 만들어진 '계약증'은 임청각을 일본인 '오카마 후사지로우'(小鎌房次郞)에게 판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임청각 매각과 관련한 문서는 1913년 음력 6월 21일 문중 사람 3명에게 매매했다는 내용의 것으로 계약주들의 도장이 없는 등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계약서'는 임청각 집과 뒷산(영남산)을 2천원에 매도할 뜻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며, '계약증'은 이창희(석주 선생의 집안사람) 씨를 보증인으로 한 정식 매매 문서인 것으로 해석된다.
매입하는 계약주는 '오카마 후사지로우'(小鎌房次郞)라는 일본인, 매도 계약주로 등장하는 '이종엽'(李鍾燁)이라는 인물은 족보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뤄 석주 선생의 아들인 이준형 선생의 가명일 것으로 보인다.
임노직 관장은 "석주 선생의 아들이 가명으로 이창희 선생을 통해 일본인 오카마 후사지로우에게 집을 매각한다는 내용"이라며 "그동안 입으로만 전해지던 임청각 매각 사실을 확인해주는 첫 문서"라고 했다.

◆주인 없이 떠돈 80년, 비운의 임청각
석주 선생이 임청각을 판 지 두 달여 만에 선생의 고성 이씨 문중은 3천원을 모금해 다시 이 집을 사들였다. 청송에 있는 천석꾼 집안 사람이 1천원을 내고, 문중 사람 3명이 보증을 서 안동 갑부에게 2천원을 빌렸으며, 나중에 길안 천지리에 있던 문중 소유 논밭을 팔아 빚을 갚았다.
이후 일제가 호적제를 시행하면서 재산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호적을 만들어야 했지만 석주 선생과 아들, 손자 등은 일제 치하의 삶을 치욕으로 여겨 끝까지 호적을 만들지 않았다.
결국 소유권이 석주 선생 직계 이름으로 올라가지 못했고 임청각은 1932년 고성 이씨 집안의 다른 사람 앞으로 등기돼 소유권이 넘어갔다.
해방 무렵 독립운동가 집안 대다수가 몹시 어려웠고 석주의 증손자인 이항증(현 광복회 경북지부장) 씨도 고아원을 전전하는 신세였다.
그가 '임청각이 석주 선생 직계가 아닌 다른 집안 4명의 소유로 돼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2000년 초였다. 죽기 전 독립운동에 몸바친 조상이 산 집의 소유권을 정리하고자 마음먹은 이 씨는 그 길로 법적인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소유권 이전을 위해 동의를 받아야 하는 집안 관계자만 무려 68명에 이르렀다. 10년 노력 끝에 이 씨는 지난 2010년 8월 4일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아 소유권 되찾기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임청각은 새 주인 이름으로 등기되지도 못하고, 건축물대장도 만들지 못한 채 무허가 건축물로 방치돼 있다.

◆임청각 등기부·건축대장 만들어야
석주 선생의 후손이 10년에 걸친 법정 투쟁 끝에 소유권을 되찾았지만 임청각은 지금까지 미등기 건물로 남아 있다. 쉬운 말로 '무허가 건축물'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의 주인을 찾기 위해 10여 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후손들을 찾아 나서고, 두 차례의 소송을 벌였던 석주 증손자 이항증 씨와 고성 이씨 후손 이동일 광복회 안동시지회장은 지난 5년 동안 안동시를 상대로 '문중 이름의 등기보와 건축물대장 만들기'를 해왔다. 그러나 곳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법원은 애초 판결문에서 "소유권 등기에 명시된 4명은 원 소유자인 문중과의 매매 계약 사실이 없어 지금의 등기는 원인무효로서 말소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이 씨 등이 이 판결문을 기초로 새로운 등기를 시도하자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임청각은 기존 소유권에 대한 등기말소 사실만 판시하고, 문중을 소유권으로 인정해 새로운 등기를 하라는 내용이 빠져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후손들은 "임청각이라는 건물에 대한 기존의 등기가 말소됐는데 현행 법률로 따지면 새로운 건축물로 지어지지 않는 한 임청각을 등기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이 때문에 안동시 건축물대장도 만들 수 없는 상태다. 앞으로 임청각의 새로운 등기를 위해 국회나 청와대 등에 탄원을 내고 특별법을 만드는 등 험난한 길을 더 걸어야 한다"고 했다.
안동 유림단체 한 관계자는 "문화재 살리기에 나서고 있는 문화재청과 안동시가 직접 나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중심을 제대로 살려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석주 서훈 등급 재심의해야
석주 선생의 증손인 이항증 전 대한광복회 경북도지회장과 후손인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용득, 외손인 박찬대 국회의원 등은 지난해 서울지방보훈청을 찾아 석주 선생의 서훈(敍勳) 등급 재심 신청서를 제출했다.
석주 선생은 1925년 9월 24일부터 1926년 1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로, 현재 독립유공자 3등급으로 서훈돼 있다.
서훈등급 3등급(독립장)에 대해 공적이 저평가 돼 있다는 것이 공통적인 인식이지만, 현행 상훈법은 훈격을 조정할 수 있는 제도가 없다.
현재 국회에는 이용득 국회의원(비례대표) 등이 '훈격 조정'을 위한 '공적재심사' 절차를 도입하는 '상훈법 개정법률안'이 발의해 놓고 있지만 법 개정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가 독립유공자에 대한 공적 재심사를 권고해 이상룡 선생의 서훈등급 상향 조정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권고안에는 독립운동 공적에 비해 현저히 높거나 낮게 서훈됐다고 판단될 경우 재심사를 실시한다 내용이 포함돼 있다.
특히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 안동 임청각에 대한 복원사업이 본격 추진되면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공감도가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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