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한 독립의 상징 '임청각']<4>임청각, 바로잡는 민족정기

〈연재순서〉

〈1〉경술국치, 안동인들의 자정순국과 선택

〈2〉안동·안동인, 만주 항일의 중심에 서다

〈3〉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년, 안동인들의 활동

〈4〉임청각, 바로잡는 민족정기

〈5·끝〉임청각, 되찾아야 할 역사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는 민족 정기 말살 정책의 하나로 독립투사 10명을 배출한 경북 안동 임청각 50여 채를 뜯어내고, 중앙선 철로를 관통시켰다. 정부는 2025년까지 중앙선 철로 이설 등 임청각을 복원할 계획이다. 안동시 제공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는 민족 정기 말살 정책의 하나로 독립투사 10명을 배출한 경북 안동 임청각 50여 채를 뜯어내고, 중앙선 철로를 관통시켰다. 정부는 2025년까지 중앙선 철로 이설 등 임청각을 복원할 계획이다. 안동시 제공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일본에 주권을 넘긴 그날, 나라 잃은 치욕의 역사는 시작됐다. 안동의 선비 향산 이만도의 단식 '자정순국' 이후 전국의 선비들이 대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

1911년 1월, 안동의 유학자였던 석주 이상룡 선생(고성 이씨 임청각파 17대 종손)은 이른 아침 500년을 지켜오던 99칸 종택을 둘러봤다. 이상룡 선생은 400여 명에 이르는 노비를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나라를 잃은 아픔은 나와 너희나 똑같구나. 너희도 이제 독립군이다."

이 말과 함께 이 선생은 품속에서 노비 문서를 꺼내 불태우고 이들을 해방시켰다. 나라를 되찾는 길에 한 사람의 힘이라도 더 모아야 한다는 절절한 마음에서였다.

이 선생은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항일과 독립투쟁에 나설 것을 다짐했다.

이어 사당에 올라 조상들에게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고하고 모신 '신주'(神主)를 가져와 마당 한쪽 땅에 묻었다.

명망 높았던 안동의 유림가 종손으로서 노비 해방과 신주를 땅에 묻은 것은 당시로는 엄청난 혁신이자 결단이었다.

복원사업 후 임청각의 모습을 담은 조감도. 안동시 제공
복원사업 후 임청각의 모습을 담은 조감도. 안동시 제공

◆'임청각 매각' 후 만주생활

보배로운 우리 강산 삼천리/ 조선 500년간 문화를 꽃피웠네/ 고향 동산 근심하지 말거라/ 태평한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무르리다/

구국을 위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을 담은 시 '거국음'(去國吟)을 남긴 이 선생은 인근 내앞마을의 김동삼 등 일가와 함께 만주행을 단행했다.

만주가 단군 성조의 영토이자 고구려 옛 땅으로 광복을 이룰 역사적 배경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린성 유화현에 정착한 이 선생은 한인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설립했다. 한인 동포사회를 규합해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키워 독립군 양성에 나섰다.

이곳에서 양기탁, 이시영 등과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열어 교포 자녀 교육과 군사훈련을 했다.

1912년 계몽단체 부민단을 조직해 단장으로 활약했고 1919년 한족회를 만들어 자치활동에 힘쓰는가 하면 서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해 독판(督辦·대표)으로 활동했다.

그 뒤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이 됐다. 조국 독립을 위해 많은 공적을 남기고 1932년 5월 12일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만 74세 일기로 순국했다. "독립하기 전에는 내 시신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복원사업 후 임청각의 모습을 담은 조감도. 안동시 제공
복원사업 후 임청각의 모습을 담은 조감도. 안동시 제공

◆임청각 철길로 훼손

선생 뜻은 자손으로 이어져 3대가 혹독한 감옥살이 등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독립투쟁을 했다. 아들 준형, 손자 병화, 동생 상동·봉희, 조카 형국·운형·광민, 종숙 승화에 이어 2018년 손부 허은(1907∼1997) 지사까지 10명이 독립유공자다.

준형은 고향에 돌아왔으나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세력이 더욱 팽창하자 1942년 아버지의 문집 '석주유고'(石洲遺稿)를 정리한 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치욕만 보탤 뿐"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임청각은 석주 선생의 17대조로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1519년 지었다. 용(用)자 형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연못 등을 갖춘 독특한 구조와 쓰임새로 건축사에 의미도 크다.

본래 99칸이었던 임청각은 일제가 독립운동 성지의 정기를 끊으려고 1941년 중앙선 철로를 놓으며 행랑채와 부속건물을 철거해 지금은 50여 칸만 남았다.

일제는 다수의 '불령선인'(일제가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을 일컫던 말)이 태어난 집으로 정기를 끊어버리겠다며 임청각 마당 한가운데 중앙선 철길을 냈다.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 역시 강제로 철거해 버렸다.

이 선생의 아들 이준형 선생의 '동구유고'에는 "집을 뜯어낸다고 해서 상당히 가슴 아팠다"는 회상이 담겨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임청각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소개하며 임청각의 옛 모습 회복사업의 추진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상룡 선생의 현손인 이창수(55) 임청각 종손은 "복원·정비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돼 임청각이 나라 사랑의 정신을 되살리는 미래세대 교육의 장으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중앙선 철로가 들어서기 전의 임청각 모습. 안동시 제공
중앙선 철로가 들어서기 전의 임청각 모습. 안동시 제공

◆임청각, 2025년까지 원형복원

일제가 1941년 중앙선 철로를 놓기 이전 모습으로 가옥을 복원하고, 석주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 주차장과 화장실, 소방시설 같은 편의시설도 재정비된다.

문화재청은 경상북도, 안동시와 함께 2025년까지 약 280억원을 투입해 임청각 복원 종합계획 수립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복원사업에 나서고 있다.

1911년 석주가 물려받은 전답과 임청각 등을 처분해 만주로 떠난 뒤 독립운동에 투신하자 일제는 독립운동 성지로 부상한 임청각 정기를 끊으려고 마당 한가운데로 철길을 냈다.

문화재청은 복원 계획을 짜면서 이상룡 선조인 허주(虛舟) 이종악(1726∼1773)이 1763년 발간한 문집 '허주유고'(虛舟遺稿) 속 그림인 '동호해람', 1940년을 전후해 기록한 사진과 지적도를 참고해 임청각과 주변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기로 했다.

다만 철로 철거와 이전이 2020년까지로 예정된 점을 고려해 먼저 기본설계·실시설계·토지 매입·발굴조사를 진행한 뒤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임청각 주변에 사라진 분가(分家, 출가한 자식의 가옥) 세 동을 다시 짓고 철도가 들어서면서 훼손된 수목과 나루터를 복원할 방침이다.

예산은 기념관 건립 70억원, 토지 매입 70억원, 분가 재건 35억원, 발굴조사 25억원, 편의시설 정비 23억원, 경관 정비 22억원, 기존 가옥 보수·복원 20억원, 설계용역과 기타 비용 15억원이 책정됐다.

권영세 안동시장은 "임청각 복원은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정기를 세우는 중요한 일이다"며 "독립운동과 나라 사랑 정신을 전하는 역사 배움터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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