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북돋움] 팥빙수의 전설

김은아 마음문학치료연구소 소장

김은아 마음문학치료연구소 소장
김은아 마음문학치료연구소 소장

성성큼 다가온 가을이 반가우면서도 물러가는 더위가 아쉬워 살짝 붙잡아 보았다. 올해 여름의 마지막 빙수를 먹으면서. 형형색색의 빙수들이 있지만 역시 빙수의 꽃은 팥빙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팥빙수에 전해져 오는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팥빙수의 기원을 옛이야기하듯 풀어볼까 한다.

옛날옛날 한 옛날, 깊은 산속에 할머니가 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어.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그런 좋은 날이었지. 잘 익은 과일과 달달구수한 단팥죽을 팔러 시장에 가는데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리는 거야. 할머니는 덜컥 겁이 났어. 이렇게 따스한 날에 눈이 오면 눈 호랑이가 나온다고 했거든. 아니나 다를까 새하얗고 커다란 눈 호랑이가 할머니 앞을 가로막아 서더니 이렇게 말해. "맛있는 거 주면 안 잡아먹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눈 호랑이는 할머니가 던져주는 딸기를 먹고는 함박웃음을 지었어. 참외를 먹고는 덩실덩실 춤을 췄지. 수박은 또 어찌나 맛있는지. 호랑이가 수박을 허겁지겁 먹는 사이 할머니는 줄행랑을 쳤어. 하지만 바람처럼 빠른 호랑이를 어떻게 이기겠어? "맛있는 거 또 줘." "네가 다 먹었잖아." "안 주면 잡아먹는다." "그러든지." "그 봇짐 내놔!" "됐다, 이놈아."

할머니는 봇짐을 뺏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호랑이는 뺏으려고 용을 썼지. 그 바람에 봇짐 안에 든 단팥죽 그릇이 하늘로 높이 치솟더니 눈 호랑이 머리 위로 '툭' 떨어진 거야. 눈 호랑이는 흘러내리는 단팥죽을 맛있게 먹었어. 그런데 이를 어째. 눈 호랑이가 뜨끈뜨끈한 열기에 사르르 녹아 범벅이 되고 말았지. 할머니는 눈 호랑이 범벅을 그릇에 예쁘게 담아 장에 내다 팔았어. 아, 그런데 눈 호랑이 범벅이 맛있다고 방방곡곡 소문이 난 거야. 그게 지금 우리가 먹는 팥빙수라는 사실. 정말이냐고? 팥빙수의 전설이라나 뭐라나.

올해 여름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그림책 '팥빙수의 전설'(웅진주니어)이 말하는 팥빙수에 얽힌 이야기이다. 이 그림책을 다양한 연령대에 보여줬더니 할머니들의 반응이 가장 뜨거웠다. 언제부터인가 할머니들이 공공도서관에서 개설하는 그림책 강좌의 주요 수강생이 되었다. 기억력은 감퇴해도 공부를 향한 열정만큼은 젊은 엄마들한테 결코 밀리지 않는다.

할머니들이 그림책을 공부하는 목적은 꽤 분명하다. 첫째는 잘 배워서 아이들을 만나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서이고, 두 번째는 손주들을 위해서이다. 그렇게 시작한 그림책 공부가 어느덧 생활의 즐거움이 되었다고 한다. 어떤 할머니는 공모전에 낸 작품이 당선됐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할머니들 사이에 불고 있는 그림책 바람이 무척 반갑다. 전라남도 곡성 서봉마을에서 평생 농사만 짓고 살던 할머니들이 뒤늦게 한글을 배워 쓴 시가 '눈이 사뿐사뿐 오네'(북극곰)라는 제목의 그림책으로 나왔다. 서툴고 투박하지만 할머니들이 정성을 다해 그린 그림까지 더해져 더욱 따뜻하고 정겹다. 그중 한 편을 소개한다.

'어매는 나를 낳고 "또 딸이네"/ 윗목에 밀어 두고 울었다/ 나마저 너를 미워하면/ 세상이 너를 미워하겠지/ 질긴 숨 붙어 있는 핏덩이 같은/ 나를 안아 들고 또 울었다/ 하늘에서는 흰 눈 송이가/ 하얀 이불솜처럼/ 지붕을 감싸던 날이었다.' 이 시를 감상하는 동안 할머니들은 "그때는 그랬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책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남해의 봄날)는 출간과 동시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다. 가난해서 또는 여자라는 이유로 글을 배우지 못했던 할머니들이 여든을 앞두고 한글과 그림을 배웠다. 그들이 쓰고 그린 그림일기가 화제가 되면서 책으로 나오고 전시회까지 열렸다. 할머니들의 도전도 박수칠 만하지만 이를 가능케 한 조력자들의 숨은 노력이 더 커 보인다. 내 어머니가 아닌 남의 어머니를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여긴 사람들이다. 가족을 위한 희생과 인내로 한평생을 살아온 그들의 여생에 꽃길이 펼쳐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리라. 할머니들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치며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도서관 관계자들, 할머니들의 작품을 귀하게 여긴 출판사가 없었다면 곡성과 순천 할머니들의 사연은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숨은 의미를 발견하고 용기 있게 세상에 펼쳐 보인 그들의 뚝심이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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