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종교의식의 비등점

전헌호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전헌호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물은 참으로 재미있는 물질이다. 우선 산소원자 1개와 수소원자 2개가 공유결합을 하여 이루어진 물이 되기까지 수십억 년의 히든 스토리를 갖고 있다. 온도가 낮을수록 밀도가 높아지는 다른 물질들과 달리 4℃일 때 가장 높아서 가장 무겁다. 그래서 4도일 때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온도가 더 내려가 0도가 되면 표면에 떠올라 어는 성질 덕분에 극지방의 바닷속에서도, 한겨울 강이나 호수 속에서도 생명체들이 얼음에 갇혀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열을 가해서 물의 온도가 올라가더라도 99도까지는 액체였다가 100도에서 형태가 완전히 다른 기체가 된다. 이런 성질을 가진 물이 순환하면서 지구촌의 온 생명체를 살리고 있다.

약 38억년이란 긴 진화의 시간을 가진 지구촌의 생명체들은 인간에 이르러 자의식을 지닌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섰다. 이것은 마치 물이 99도에서 비등점인 100도에 이른 현상과 같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진화는 이후에도 물이 비등점에 이른 차원의 진화를 거듭했다. 죽은 자를 내버려 두지 않고 장례를 치르는 행위를 통해 사후세계에 대한 사유와 동경을 하게 된 시기, BC 약 1만 년 전에 있었던 수렵생활에서 농경생활로의 전이,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를 넘어 철기시대로 넘어온 것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황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들은 서로 교류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적고 잉카, 마야 문명은 그 지역으로 미루어 볼 때 앞의 문명들과 교류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런데 이러한 문명이 그곳에서 각자 발전한 것도 물이 비등점에 이른 것과 같은 현상으로 볼 수 있겠다.

BC 500년 전후로 지구촌에서 살던 인간에게 또 하나의 비등점에 이른 도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가, 공자, 노자, 장자, 구약성경의 저자들과 예수, 소크라테스가 시기적으로 전후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각자 살던 곳에서 등장했다. 이전의 도약은 생존과 관련된 영역에 속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인간 삶의 근본적 영역에 대한 사유와 관련된 도약이다.

21세기에 들어온 인류는 또 하나의 비등점을 통과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구촌과 우주에 대한 이해, 나노기술, IT, AI, 뇌과학, 분자생물학 등이 나날이 대단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이에 기초한 응용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하고 어디까지 변해갈 것인지 누구도 올바르게 예측할 수 없는 상태다. 자연자원의 고갈, 생활쓰레기와 산업폐기물, 늘어나는 세계인구와 빈부 차이에 의한 갈등은 지속가능한 개발과 지속가능한 삶을 어렵게 하고, 많은 것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보게 한다.

비등점을 통과하는 도약은 종교적 영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과학시대에 태어나 지구촌의 온갖 문화, 학문, 종교,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정보들로 무장한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많이 다른 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들 중에서 스님, 목사, 신부, 수도자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의 의식도 이전 세대와 같지 않다.

그래서 전통종교들은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고 구성원을 확보하기가 날로 힘들어지고 있다. 수세적으로 담을 높인 종교단체들은 정체성과 조직을 유지해나가기가 어려워졌다. 모든 종교가 다 같이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할 위험마저 보인다. 진정성을 지닌 진리와 활동, 상호 대화와 협력만이 미래를 열어낼 수 있을 것이다. 냉소의 길과 삶의 길, 선택의 귀로에서 저절로 두 손 모으게 된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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