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별고을 이야기
만물이 그렇듯 사람은 하늘이 낸다. 하지만 땅의 기운이 사람의 몸과 정신에 좋은 영향을 더해주지 않는다면 삶은 순탄하지도 윤택하지도 않는 게 이치다. 죽음도 예외일 수 없다. 땅은 죽음을 맞는 모든 사람이 돌아가 쉴 집이다.
죽은 자의 터를 따지고 공력을 쏟는 것은 누구든 생명의 시작과 성쇠(盛衰) 그리고 죽음, 즉 생사고락의 틀 안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개인과 집단, 국가로 구분되는 인간사회도 이 법칙 아래 존재한다. 생(生)과 삶(活), 죽음(死)의 순환을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표현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길지(吉地), 성주
성주는 예부터 사람이 모인 땅이다. 작은 물이 모여 큰 물줄기가 돼 땅을 적시고 크고 작은 산들이 버티고 있으니 사람이 의지했던 땅이다. 그런 형세를 가진 길지를 금수강산 어디서든 볼 수 없었겠나.
그렇지만 땅 기운이 조화롭고 지세가 훌륭하다고 무작정 사람이 모여들지는 않는다. 숱한 인간을 다 품어낼만큼 기운이 넉넉하고 풍속이 아름다워야 그 땅은 성하다. 사람이 모여 고을을 이루고 그 땅을 대대로 일궈온 이들의 기운과 마음 씀씀이가 한결같지 않다면 발 붙이고 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 비쳐볼 때 우리네 땅에서 길하고 상서로운 곳을 찾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성주는 산천이 밝고 수려해 일찍이 문명이 뛰어나고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씨를 조금만 뿌려도 수확이 많아 영남에서 논이 가장 기름지다"고 평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성주의 산천경개(山川景槪)가 뛰어나고 사람에게 이로운 땅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난한 성주 지명
성주는 사람 살기에 좋은 땅, 이를테면 길지다.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고, 지금도 4만5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대대로 터를 일궈왔거나 새로 거처를 마련한 사람들이 서로 이웃하며 살고 있다.
성주(星州)를 글자대로 풀이하면 '별고을'이다. 역사적으로 성주는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 지명은 성주의 안산인 성산(星山)에서 나왔다. 도한기의 '읍지잡기'에 '성주 읍내는 풍수상 와우형이다. 안산을 성산이라고 한 까닭은 소가 별을 보며 누워 있는 모양 때문이다'고 기록돼 있다. 가야연맹체 시절 성산가야의 중심지인 이 곳은 벽진국으로 불렸다. 이후 신라에 속하게 되면서 본피(本彼), 적산(狄山), 신안(新安), 도산(都山)으로 지명이 여러번 바뀌었다. 고려 개국 이후에는 경산(京山)으로 불렸고, 광평(廣平) 대주(岱州)도 성주의 다른 이름이다. 성주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때는 고려 충렬왕 시절인 1308년 성주목(星州牧)으로 행정구역의 격이 높아지면서다.
그런데 불과 이태 뒤인 1310년 경산부로 되돌아가고 만다. 조선 태종 1년(1400년) 다시 성주목이 되면서 성주는 조선 전기 경상우도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성주는 한양으로 가는 출발점이자 어명을 받은 고관들의 도착지였다. 경상우도 저치미(儲置米·세곡으로 받아들인 쌀)의 비축지도 성주였다는 사실은 성주가 당시 지방행정과 교통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사람 운명이 길흉화복의 굴레에 놓여있듯 땅 이름도 다를바 없다. 지명이 계속 바뀐다는 것은 그 땅의 다난(多難)한 역사와 고단한 인간 삶을 말해준다. 성주는 부침을 계속했다. 광해군 7년(1614년) 성주사람 이창록이 임금의 비행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목(牧)이 혁파된다. 부·목·군·현 가운데 가장 낮은 단계인 고령현에 합속되는 비운을 맞기도 한다. 훗날 성주사람이 연루된 모역사건과 강상(綱常)죄 등 고을 흉사가 겹치면서 몇 번이나 성산현이나 신안현으로 떨어졌다가 영조 21년(1745년) 목으로 다시 승격하면서 지금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생명문화의 요람
수령이 300~500년 된 아름드리 왕버드나무 수십 그루가 울창한 성주읍 경산리 성밖숲은 예나 지금이나 성주의 심볼이다. 생명을 대하는 이 땅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성밖 마을 아이들이 까닭없이 죽어나가자 액을 쫓기 위해 만든 이 비보림(裨補林)은 생명을 지키려는 성주인들의 정신문화와 집단의식의 근원을 짐작케 한다.
별고을이 생명의 땅인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조선 개국 무렵, 자손의 발복과 왕실 번성을 위해 좋은 땅에 왕자들의 태를 묻었다. 특히 성주에 태실(胎室)이 집중된 것은 성주가 빼어난 땅임을 증명한다. 태종의 태실이 용암에, 세종대왕자 태실이 월항에, 단종 태실이 가천에 자리했다. 현재 태종과 단종 태실은 흔적만 남은 반면 세종대왕자 태실은 조선 왕실의 태실이 조성된 전국 320곳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역사적·인류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왕실뿐 아니라 여염에까지 두루 성행한 이런 장태(藏胎) 의례는 새 생명의 탄생을 중시하는 우리 선조들의 생명사상을 엿볼 수 있는 고유 문화라는 점에서 깊이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댓글 많은 뉴스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