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제식과 의례의 동물이다. 인간은 제식과 의례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확인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에서 행해지는 거의 모든 행사에 '의전'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장식이 붙기 시작했다. 심지어 장식 정도가 아니라 본 행사보다 의전이 더 중요한, 주객과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을 자주 목격한다.
각종 행사에 내빈석을 따로 두고 많게는 수십 명에 이르는 내빈 소개 후 각 기관장 및 의원님들의 비슷비슷한 축사 또는 격려사를 대여섯 번 들어야 겨우 목적한 행사의 입구에 도달할 수 있다.
행여 행사 주최 측에서 내빈 서열 순서를 바꿔 부르거나 호명이라도 빼먹으면 '사람 불러놓고 뭐 하는 거냐'는 항의가 쏟아진다. 또 자신이 축사에서 빠졌을 경우 마이크도 안 주면서 왜 불렀느냐는 불쾌한 심사를 드러내기 일쑤다. 전체 행사시간의 절반이 의전에 투입되는 과례(過禮)가 일반적인 현상이 됐다.
내빈으로 소개되지 못하고 축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피로감은 극심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급의 인사가 행사에 참석하느냐를 두고 행사 며칠 전부터 각 기관 간 치열한 눈치작전이 벌어지기도 하고 행사장에 다른 인사들보다 늦게 도착하기 위해 일부러 차 타고 행사장 주변을 빙빙 도는 웃지 못 할 촌극을 벌이기도 한다. 대한민국 공직사회 주요 업무 중의 하나가 의전이라는 말은 절대 과언이 아니다. 과잉 의전은 상급자의 허영심과 하급자의 과잉 충성이 결합한 결과다. 상급자의 허영심은 권력 남용의 심리에서 발생하고 하급자의 과잉 충성은 사익 도모를 위한 간심(奸心)에서 발생한다. 과잉 의전은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니지만 과잉 의전에 능숙한 사람은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과잉 의전은 데이터로 측정할 수 없지만 그 폐해에 대해서 누구나 문제 의식을 가진다는 점과 공직사회와 민간기업을 불문하고 하나의 문화처럼 퍼져 있어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과잉 의전은 보이지 않는 갑질의 또 다른 모습이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행정력의 낭비는 국민 전체의 부담으로 다가온다. 과잉 의전의 문제는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구·경북의 의전 문화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 대구·경북의 '탈꼰대화'가 지역 발전의 화두가 되고 있다. 보수적인 꼰대 지역이라는 이미지가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시·도민 대부분이 공감하고 있다.
대구·경북이 먼저 선도해 내빈 소개와 축사가 없는 '행사의례준칙'이라도 만들어 실천한다면 대한민국은 의전공화국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제고하는, 작지만 큰 발걸음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란 공허한 이념이 아니라 실천적 삶이다.
대한민국이 오랫동안 꿈꾸었던 대동(大同)의 세상은 거대담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작은 파편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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