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반조(反趙)와 반조(反曺)

서종철 논설위원
서종철 논설위원

조광조의 첫 관직은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였다. 종이를 만들고 관리하는 하급 관리다. 진사시를 거쳤지만 아직 문과를 통과하지 않았고 음서도 아닌 그가 34세에 종6품 벼슬을 받은 것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발탁 때문이다. 성균관 유생 중 조광조와 김식 등 신진사류가 함께 특채됐다.

하지만 조광조는 이런 '조행'(操行) 천거를 마뜩잖게 여겼다. 품행 등 평판에 기초한 천거를 말한다. 당시 그는 소학을 늘 몸에 지니고 애독했는데 중종반정 공신 등 실권을 쥔 소인배들은 '모름지기 소학을 열심히 읽으라. 사지의 공명이 절로 온다네'(一部小學須勤讀 司紙功名自然來)라며 비꼬았다. 그러나 곧 알성시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했고 이어 사간원 정언(正言)과 경연시독관을 겸임하며 중종의 신임을 얻는다.

언관으로서 조광조의 첫 소임은 반정 공신인 대사간 이행, 대사헌 권민수의 파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행 등이 상소한 사람을 도리어 탄핵하고 언로를 막아 국가를 위태롭게 했다는 게 파직 주청의 명분이었다. 빗대자면 감사원의 하급 공무원이 대통령 면전에서 직속상관인 감사원장과 검찰총장의 파면을 요구한 격이다. 조광조는 집안 단속을 잘못한 하인을 심하게 나무라던 스승 김굉필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든 군자의 사기(辭氣)는 조심하는 게 옳습니다'며 직언할 정도였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귀가 솔깃했던 중종은 한 달 사이에 네 번이나 승차시킬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출사 3년도 안 돼 당상관이 된 그의 사례가 얼마나 파격이었으면 실록에 사관이 견해를 남길 정도다. 그런 조광조의 개혁 정치도 훈구파와의 대립과 반목이 깊어지고 홍경주·남곤 등의 모함으로 파국을 맞는다. 개혁과 반개혁의 피 튀기는 정쟁이 기묘사화라는 결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1519년, 조광조는 사사됐다. 꼭 500년 전의 일이다.

요즘 우리 정국의 소용돌이는 조국 법무부 장관이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불거진 불미스러운 일이 국민 심기를 크게 어지럽혔다. 장관이 되자마자 윤석열 검찰을 겨냥한 무리한 개혁 행보도 논란을 불렀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은 하루가 멀다하고 조 장관 파면을 요구하면서 정국이 온통 '조국 블랙홀'에 빨려드는 처지다. 마치 청산과 개혁의 대상이 된 훈구파의 반조(反趙)와 지금의 반조(反曺) 저항이 묘하게 치환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역사에 보이듯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중도에서 꺾였다. 못나서가 아니라 그의 창이 기득권 세력의 두터운 방패를 뚫지 못해서다. 혁신과 수구의 틈바구니에 낀 중종의 환멸과 변심도 한몫했다. 지금의 우리 국민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주권자인 국민은 얼마만큼 조국의 검찰개혁을 납득하고 동조할까.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검찰의 잘못된 관행은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 하지만 검찰을 제 입맛대로 뜯어고치고 바꾸려는 정치권의 시도는 자칫 엉뚱한 결말을 낳는다.

오늘부터 20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가 열린다. 만약 조국 장관 파면을 둘러싸고 여야가 극한의 힘겨루기 판을 벌인다면 국민 실망이 커질 수밖에 없다. 진정 국민과 나라를 위한 국회가 되도록 여야 모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조광조는 '군자소인지론'에서 '큰 간신은 충신 같고, 큰 탐관은 청백리 같다'고 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누가 군자이고 소인배인지 정확히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국민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희박한 쪽이 간신이고 탐관이다. 여야 모두 자기 위치가 어디인지 곰곰이 따져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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