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무너진 코리안 드림

김수용 편집국 부국장
김수용 편집국 부국장

경북 영덕 한 오징어가공업체에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 4명이 지하 폐기물 탱크에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차례로 쓰러져 숨졌다. 이들은 지난 10일 오후 2시 30분쯤 안전 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채 깊이 3m, 가로·세로 3~4m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된 탱크에서 작업을 하다 황화수소 등 유독가스에 의해 질식해 숨졌다.

지하 탱크로 처음 내려간 노동자가 갑자기 쓰러졌고, 다른 3명이 황급히 구하러 들어갔지만 현장에 있던 업체 대표는 이를 막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과 고용노동부는 업무상과실치사·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업체 대표를 수사 중이다.

대구경북 이주노동자 인권·노동권 실현을 위한 연대회의는 영덕 사건을 '예고된 살인'이라고 밝혔다. 지하 3m 수산물 폐기물 탱크를 청소하려면 산소포화도를 측정하고 안전보호구를 착용해야 하지만 마스크조차 지급되지 않는 상태에서 작업을 지시받았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지난 2016년 고령 제지공장 원료 탱크 질식 사망사고, 2017년 군위와 경기 여주 양돈 농가 사망사고 등 이주노동자 질식 사망사고와 똑같은 모습이다. 이들 사건 모두 밀폐된 공간에 쌓인 황화수소가 사망 원인이었다.

유기물이 썩는 과정에서 자연 발생하는 황화수소는 썩은 달걀 냄새처럼 악취를 내뿜고, 공기보다 무거워 밀폐된 공간의 바닥에 쌓인다. 하지만 황화수소가 일정 농도 이상 누출되기 전까지는 냄새를 맡을 수 없고, 임계치를 넘어서면 냄새를 잠시 느꼈더라도 바로 후각신경이 마비된다. 황화수소 농도가 100ppm 이상이면 후각신경이 마비되고, 700ppm 이상에 노출되면 노출 즉시 호흡 정지로 숨질 수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영덕 사고 현장을 감식한 결과 탱크 내부의 황화수소 농도는 3천ppm에 달했다. 갑자기 쓰러진 동료를 구하려다가 '집단 참사'가 벌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슬러지가 쌓여 있고 밀폐된 곳에 무방비로 들어가도록 한 자체가 살인행위라고 말한다. 연대회의는 "이주노동자들의 사망사고가 잇달아 일어나도 사업주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법원, 인력을 핑계로 관리감독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는 고용부, 노동자의 생명보다는 기업의 이윤이 우선이라는 사업주의 생각들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비판했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법무부의 '비전문취업(E-9)자격자 국내 체류 중 사망 현황'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9년 8월까지 비전문취업 이주노동자 1천137명이 숨졌다.

한때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독일로 중동으로 꿈을 좇아 떠났다. 비록 모든 것이 낯선 타국이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가족을 위해 나 하나쯤 고생해도 괜찮다고 그렇게 위로하고 다짐했다. 독가스에 중독돼 외마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덧없이 마감한 이주노동자들도 대한민국으로 찾아오면서 그렇게 위로하고 다짐했으리라.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딸이었으며, 부모였던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자신뿐 아니라 가족 전체의 삶을 바꿔줄 수 있는 기회의 땅이자 꿈의 발판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들을 독가스로 가득 찬 돼지분뇨통으로, 폐기물 탱크로 몰아넣어 한 가족의 유일한 희망을 앗아가 버렸다. 잠시 여론이 들끓겠지만 이내 사그라질 터이다.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둘러싼 다툼이 온 나라를 집어삼켜버렸다. 그렇게 젊은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이 잊혀져가는 사이 누군가 다시 꿈을 찾아 대한민국으로 향할 것이다. 최소한의 생존 장비도 없이 독가스 탱크로 내모는 죽음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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