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땅, 길지(吉地) 성주의 생활사(生活死)를 알면 하늘이 낸 사람의 뜻있는 삶(活)을 살아갈 길 하나쯤 만나리라. 나고 살고 죽는 순환의 고리 가운데가 삶이다. 그 삶의 길에 나라 대신해 사재(私財)로 농민을 도와 못을 파고, 보와 둑을 쌓고, 물길을 낸 사람이 있다. 유학자에서 기녀(妓女)에 이르기까지 여럿이다. 별고을을 널리 이롭게 한 그들 자취는 글과 입, 돌과 비석이 전하고 있다.
◆못(池) 파고 보(洑) 쌓고 물길(水路) 낸 사람들
봉지(鳳池) 또는 봉황지(鳳凰池). 이순흠(李舜欽)이 1천여평에 물을 가둬 성주읍 학산1리 답계(댁기)마을 들을 적신 못이다. 후손 이일화(77)씨 말처럼 '증조 때부터 못 물을 썼는데 이젠 지하수 개발로 쓰지 않아 반쯤 메워졌다.' 옛 모습을 잃고 둑에 늘어선 100년 넘을 아름드리 왕버들과 무성한 갈대가 나라는 망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준다. 작은 비석 앞면에 '봉지를 파고, 부역을 덜어주고, 사람들 굶주림을 구제한 덕업을 잊을 수 없어' 새긴 42글자는 세월을 거슬러 그때를 말해준다.
못을 파던 1912년은 일제 암흑기. 지주 중심의 왜곡된 소작제로 농민은 입에 풀칠조차 버거웠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은 그야말로 꿈. 2천만 한국인의 80%가 농민, 농민의 80%는 소작농에 문맹이고, 생산의 반 넘게 소작료를 뜯기던 때다. 논밭에 물은 생명수였고, 소작료 내고 굶지 않을 농사를 위해선 못은 절실했다. 나라가 외면하니 그라도 못을 파야 했다. 뒷날 '성산지(星山誌)'도 펴낸 그였으니 '만인의 여론(萬口)으로' 1918년 그를 기린 비 하나를 세운 동네 사람 마음을 알 만하다.
성주에선 사재를 털어 물을 다룬 이런 수리자선(水利慈善)은 이미 오래다. 1703년 만든 대가면 옥련리 비은내지(非隱乃池·빈내못)와 1881년 쌓은 대가면 대천리 입평보(入坪洑), 1950년대 이뤄진 낙동강변 성남수리(星南水利)가 그렇다. 나라 몫인 치수(治水)를 민간이 앞섰으니 별고을에 흐르는 홍익(弘益)정신인가.
바위에 새긴 비은내지 사연을 곽명창 관광해설사는 '비가 오면 내가 흐르고, 그치면 물이 마르는 곳'으로 풀이했다. 1703년 제방을 쌓고 1704년 비를 세우니 300년 세월이다. '만세(萬世)에 이익을 누리게 제방 쌓기에 앞섰지만(首唱)', 이름이 지워져 알 수 없는 '그'를 '천년(千年)에도 잊지 않으려는' 마을 칭송이 쟁쟁하다. 또 200년 뒤 1881년, 대가면 성한호(成漢鎬)도 큰 재산(巨財)을 내어 입평보로 '산을 깎고 내를 터서, 혜택을 온 밭에 입게 하였'으니 그의 업적을 작은 돌에 새길 만했다.
70년이 흐른 1950년대 중반, 낙동강물로 모래밭을 옥토로 바꾼 수리사업이 이뤄졌다. 선남면 출신의 정근후(鄭根厚)는 재산을 털고 밀가루를 나눠주며 물길을 냈다. 정부도 지원, 13km의 긴 수로와 양수장을 만드니 칠곡군 기산면 노석리~성주군 선남면 소학리의 9개 마을 609가구가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 집집마다 3,000~5,000원을 거둬 비를 세웠다고 정정섭(79) 5촌 조카는 회상했다. 1967년, 그는 떠났지만 19881년 강변 선남면 소학고개 야산에 세운 비는 오늘도 옛일을 전한다.
◆성주에 제방 만든 대구 여성, 염농산
앵무 염농산(廉隴山·본명 염경은)은 나고 자란 대구 보다 성주에서 만나기 쉽다. 관기(官妓)였으나 국채보상운동 의연금 내기와 교남학교(현 대륜중고) 돕기에 나섰고, 동아일보는 1938년 5월 24일 그녀를 '여사(女史)의 장지(壯志)'라 칭송했다. 그 흔적을 대구에선 찾기 힘들지만, 그녀가 성주 용암면 두리방천에 1917년 둑을 쌓은 덕에 성주에선 오늘도 전설로 기억된다. 사연은 용암의 염농산제언공덕비에 생생하다. '쇠내들에 돌을 쌓아 든든히 하니/…/마을과 부락이 그리하여 편안해지고/…/벼를 심어 풍년을 이루었네/나라의 정책과 백성들의 살림이/그 공덕을 함께 입었네/….'
사재를 털어 방천에 '열 삼태기 흙을 모아 산을 쌓고 돌을 쌓아' 제방을 만들자 '논밭의 두렁이 이로써 완성'되었다. 주민들이 1919년 음력 5월 5일 단오절 비를 세웠으나 3·1만세여파로 제막식은 1937년에야 이뤄졌고 그녀는 학춤(새저리춤)으로 보답했다. 1860년 태어나 20세 전후 경상감영 관기가 된 앵무의 학춤이 기억되고 앵무들, 두리방천과 함께 성주에서 전설처럼 적혀 구전되는 까닭이다.
1947년 88세로 떠난 여사를 기리는 사람도 있으니 명절 제(祭)를 올리는 홍영기 전 성주문화원 부원장(79)이다. 1945년 용암에 이사와 1985년, 비석 옆 비각 관리사를 사 집을 짓고 산 이후라 했다. 그의 "비 곁에 살며 간단히 제를 올리나 빗집도 없고 방치돼 안타깝다"는 말에 마음이 짠하고 무겁다. 정인열 기자 oxe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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