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추억의 요리 산책] 햇밤

햇밤
햇밤

새벽에 전답(田畓)을 둘러보고 온 아버지 주머니 속에서 알밤이 우르르 쏟아졌다. 반질반질한 알밤 껍질을 앞니로 벗겨내고 속 껍질을 대충 긁어냈다. 햇밤의 아삭거리는 식감에 이어 율피의 떫은맛이 입안 가득 끈적거렸다.

밤 수확기가 시작되면 삶아 먹고, 구워 먹고 온통 밤 일색이다. 그중 군밤이 최고였다. 밤 머리 부분에 살짝 칼집을 내어 숯불에 던져놓으면 뽀글뽀글 거품을 토해내며 익어간다. 약간 덜 익은 상태에서 껍질을 까야 깨끗하다. 너무 오래 두면 까맣게 타고 딱딱해진다. 야외에서는 철망 소쿠리에 밤을 담아 불에 올려 구우면 된다. 집에 에어프라이기가 있다면 밤 굽기에 유용하다. 그러나 어이하리, 밤 속에 꼬물거리는 벌레를 보면 밤맛이 싹 가신다.

설과 제사에 사용할 밤을 보관해야 한다, 모래에 묻기도 하고, 소금물에 담그기도 했다. 그래도 벌레는 기승을 부렸다. 그뿐만 아니라 밤을 주워오는 다래끼 속에는 칡넝쿨 껍질로 목을 묶은 배암도 들어있었다. 까치독사는 가을철에 독이 바싹 올랐다며 밤을 주울 때 조심하라고 어른들은 누누이 당부했다.

밤은 우리나라 관혼상제 상차림에 사용하는 필수적인 과실이다. 제사상은 물론 혼례 때도 다남(多男)을 상징하며 떡하니 자리를 차지한다. 밤(栗)송이에는 통상 세 개의 밤톨이 들어있다. 이는 삼정승을 뜻하며 후손이 출세하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밤은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은 후에야 씨앗 밤이 썩는단다. 이 또한 조상과의 연결을 상징하는 것이다. 밤송이가 벌어져 밤톨이 터져 나오는 것은 '모태를 떠나 독립'한다는 뜻으로 보았다.

밤에는 영양가가 많다. 본초학에 보면 대게의 과일은 시(酸)고 달다(甘)고 하는데, 유독 밤만큼은 함(鹹짜다)하다며 간이 맞다고 하였다. '과중 율최유익(果中 栗最有益)'이라 하여 과일 중에서 밤이 가장 몸에 이롭다고 기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율피를 찧어 꿀과 섞어 얼굴에 바르면 피부를 팽팽하게 한다니 미용에도 참작할 만하다.

밤을 깎아서 원래의 모양대로 졸이면 율초(栗炒), 밤을 삶아 으깨어 꿀을 섞어 빚으면 율란(栗卵)이 된다. 과실을 익혀 원래의 모양이나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든 것을 '숙실과(熟實果)'라 하며 잔칫상과 제사상에 올렸다. 풍족할 때 졸여서 냉동실에 저장해 놓으면 1년 내내 먹을 수 있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약밥, 찰밥, 연밥, 찜 등에 쓰면 유용하다. 밤을 떡에 넣기도 하고, 밤을 말려 가루로 만들어 죽을 끓여도 맛있다. 요즘은 밤으로 묵을 만들기도 한다.

밤으로 놀이한다. 밤을 깎아 설탕물에 졸인다. 꿀은 열을 가하면 영양소가 파괴되어 좋은 효능을 잃게 되므로 마지막에 넣는다. 소금 약간, 계핏가루는 기호에 따라 가감한다. 삶은 밤은 으깨어 꿀에 버무려 모양을 만든다. 밤 가루를 채에 쳐서 율란을 만들면 모양이 잘 잡힌다. 급하게 만들다 보니 모양이 잘 잡히지 않았으나 밤 맛 꿀맛이 어우러져 밤꿀맛이다.

노정희 요리연구가
노정희 요리연구가

Tip: 밤은 냉장 온도 1~2도를 유지해서 보관하면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삶아서 껍질을 제거한 후 냉동 보관하여 필요시에 사용해도 된다. 밤을 구울 때 반드시 겉껍질에 칼집을 내주어야 한다. 밤 안쪽의 공기가 폭발하여 밤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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