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끼리 모여 회식을 하는 자리에는 으레 '9988'이란 건배사가 따른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죽었으면 하는 기대감의 건배사이다. 요즘에는 거기에 덧붙여 '234'라는 숫자가 들어간다. 이틀이나 사흘 앓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다. 고령사회에 접어들면서 정부에서 많은 노인복지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어르신들을 만족시켜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2일은 '노인의 날'을 맞아 어르신들이 많이 모이는 대구시내 몇 군데를 가봤다
◆두류공원·달성공원·경상감영공원
두류공원과 달성공원, 경상감영공원은 어르신들의 전용공간이 된 지 오래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와 그늘, 벤치가 곳곳에 있어 어르신들이 즐기기엔 딱이다.
두류공원에는 성당못 주위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부류를 비롯해 산책을 즐기는 사람, 삼삼오오 바둑과 장기를 두는 부류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모두 달서구와 남구, 달성군에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가까워서인지 지하철이나 버스, 오토바이, 자전거로 오는데 공원 곳곳에는 오토바이와 자전거 거치대도 눈에 띈다.
월배에서 매일 이곳을 찾는다는 김학철(가명·75) 어르신은 "너무 좋다. 못 주위 산책도 하고 벤치에 앉아 자주 만나는 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며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격해져 다툰 이후로는 정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소일하기에 이만한 장소가 없다"고 했다.
인근 성당동에 산다는 박동철(가명·76) 어르신은 "이곳에 오면 돈 쓸 일이 없다. 자판기 커피값만 있으면 하루종일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이곳은 화요일과 수요일은 밥차가 운영돼 점심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늘 아래에선 장기와 바둑을 두는 어르신들이 많이 볼 수 있다. 가끔 훈수를 둬 말싸움이 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웃고 넘어 간다. 바둑으로 하루를 소일하고 있다는 이영석(가명·71) 어르신은 "바둑만큼 시간을 보내기 좋은 것은 없다"며 "이기다 지다 수십 판을 두다보면 하루가 저문다. 주머니가 얇은 우리들이 시간 보내기에 딱 좋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환경미화원은 "단속을 해 예전처럼 화투판을 벌이는 어르신들은 없지만 아직도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술에 취해 노상방뇨하는 어르신이 있어 그것이 가장 꼴불견"이라고 했다.
달성공원 역시 역사와 나무, 동물이 있어 인근 어르신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창영(가명·78) 어르신은 "공원 곳곳에는 역사가 있는 비와 나무, 동상이 있어 둘러보면 많은 공부도 된다. 지겨우면 동물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하루해가 저문다"고 했다. 최재성(가명·72) 어르신은 "공원 주위에 살아 언제든지 올 수 있어 너무 좋다. 공원 둘레길 토성을 쉬엄쉬엄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했다.
경상감영공원은 역사가 있고 운치가 있는 공원이다. 벤치에 앉아 친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어르신, 졸고 있는 어르신, 눈을 지그시 감고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미스트롯 가수의 노래를 듣는 어르신도 보인다.
한켠에는 장기와 바둑을 두며 옥신각신 다투고 있다. "포로 장군을 치면 이겼네"라고 하자 "훈수 두지 마라카이" 하면서 얼굴을 붉힌다.
칠성동에 산다는 김기화(가명·78) 씨는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사귈겸 집도 가까워 매일 같이 온다. 주위 음식점도 가격이 저렴해 부담이 없다"고 했다.
꽃단장을 한 남녀 어르신도 간혹 보인다. 이철균(가명·70) 어르신은 "주위에 사교춤을 출 수 있는 콜라텍이 있는데, 가끔 들러 땀이 흠뻑 날 정도로 춤을 추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땀 빼고 난 뒤 추출하면 막걸리나 소주 한 잔 하고 귀가한다"고 했다.

◆평생대학원·모임방
퇴직해 평생대학원이나 모임방을 드나들며 즐기는 어르신들도 있다. 이들 어르신들은 교양이나 시사, 문화 강좌를 듣고 동아리에 가입해 취미활동을 즐기는가 하면 등산이나 파크골프 등으로 건강을 챙긴다. 이들은 교사나 공무원, 회사 간부 등 안정된 직장을 다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어르신들이다.
친구들과 시내에서 종종 만난다는 이석희(가명·72) 씨는 "미도다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점심 먹고 저녁 무렵까지 일 보다가 날씨가 궂거나 하면 초밥집에 들러 정종 한 잔 하고 간다"고 했다.
담수회(淡水會)에서 한문강의를 배우고 있다는 한인화(65대명동) 씨는 "일주일에 두 번 한문강의를 듣는데 친구도 사귀고 너무 좋다" 며 "강의가 있는 날이면 화장도 하는 등 꾸미고 가는데 젊어지는 것 같다. 또 시내에 활보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자극도 된다"고 했다.
담수회 전홍식 부회장은 "이곳은 주체적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어르신들이 주로 가입하는데 회원들이 늘고 있다"고 했다.
◆실버 놀이터로 부상한 반월당역
도시철도 반월당 메트로센터 지하상가. 광장 의자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 수십 명이 앉아 있다. 광장 주변에 있는 기둥의자나 원형으로 된 2층 의자에 있는 어르신들까지 삼삼오오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반월당 지하상가에 '은빛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됐다. 2005년 도시철도 2호선 개통으로 반월당역이 환승역이 되고, 지하상가가 활성화되면서 어르신들이 갈수록 늘어난 것. 커피 한 잔을 들고 책이나 신문을 읽거나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대화하는 어르신들도 보인다.
이곳을 찾는 어르신 중 상당수는 인근 무료 급식소에서 식사를 마친 이들이다. 어르신들은 눈'비가 내리는 날, 강추위나 무더위로 야외 활동이 어려운 겨울'여름에는 "여기가 최고"라고 입을 모은다. 이경진(가명·68) 씨는 "두류공원이나 달성공원에도 자주 다녔지만 날씨가 춥거나 더우면 이곳을 찾는다"며 "지하상가를 따라 현대백화점에서 경대병원까지 1㎞ 정도 되는 구간을 걸어 왕복하면 40분 정도 걸리는데 가벼운 운동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라고 말했다.
지하상가 내 음식점 중에도 어르신이 자주 찾는 곳은 한 끼에 3천~5천원 안팎으로 가격도 저렴하다. 박봉수(85'대구 동구 신천동) 씨는 "먹거리나 볼거리가 많은 이곳이 좋다"며 "저렴하게 한 끼 사먹고 카페라테까지 한 잔 마시고 나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고 말했다.
반월당 지하쇼핑 메트로센터 김재식 대표는 "어르신들은 낮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다음은 젊은이들로 교체된다"며 "교통이 좋아 접근성이 용이하고 음식값도 저렴해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것 같다. 특히 비가 오거나 덥고 추울 때 더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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