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고을의 삶에는 밥을 베풀고 이웃을 구한 이도 있고, 재능기부로 배우지 못한 아이를 가르친 동네 어른과 그 제자가 또 가르치고, 그 제자와 자제가 모임을 꾸려 인연을 이은 일도 있다. 고향에 정성을 보탠 재일교포 출향인도 숱하니 고향 사랑의 또다른 일상이다. 흩어진 그들 흔적을 홀로도 좋고 누구와 동행해 찾아도 울림 있는 나들이가 될 만하다.
◆거지와 길손, 이웃에 나눔 실천한 사람
'나그네 등'이 비(碑)를 세우다(客等立)?
그 비와 주인공, 비를 세운 이가 궁금해 용암면 상신리 남평문씨 세거지를 찾았다. 1932년 9월 세운 작은 송덕비가 맞는다. 일제 핍박과 수탈에 굶주린 나그네, 거지, 이웃에 밥과 돈을 나눠준 성균관 진사 문한주(文瀚周). 초라한 겉모양과 달리 사연은 진하다. 1929년 그가 죽자 따뜻한 밥 한 그릇 베푼 일을 잊지 못해 한푼두푼 모아 39글자를 새겨 비를 세웠을 '나그네 등'의 마음이 엿보인다.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며/ …/ 옷도 주고 돈도 주어서/ 어려운 이 구해주고 가난한 이 구휼했네/ …/ 한 조각 비석이 말을 할 수 있으니/마음의 진실함 이로써 표창하네.'
문상완(67) 이장은 "그 어른 집에는 거지, 길손 등을 위해 창고에 음식을 늘 두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비석 사연을 더 알 만한 자료 등이 10여년 전쯤 불 탔다니 아쉽다. 비를 세운 이가 누군지 끝내 알 길 없다. 직계 후손 문상직(73) 전 계명대 교수는 "옛날 집은 3천300석 부자였다. 집 문앞에 '부릿독'이란 큰 독의 곡식을 지나는 이가 바가지로 퍼갔고, 과객을 맞고 옷도 입혀 보냈다는 할머니 말을 들었다"며 회상했다.
성주에 18왕자 태(胎)를 묻고 사고(史庫)까지 둔 세종은 실록에만 8번 나올 만큼 '밥은 백성의 하늘'이라 강조했다. 1876년 영남을 휩쓴 흉년과 아사(餓死) 재앙을 겪고 걸식자를 도운 일을 적은 도한기도 '읍지잡기'에서 "음식이 사람들에게 소중함이여, 어짊이 백성의 하늘이 됨을 알 수 있도다"고 했다.
문 진사처럼 성주읍 도갑모(都甲模)가 외로운 군민을 돕고, 대가면 여상재(呂相載)가 힘든 이웃을 구하고, 금수면 이만수(李萬綬)가 굶주린 이를 돕고 가르치자 뒷사람이 비를 세운 까닭도 같으리라. "밥 먹었느냐?"가 인사였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가르침을 나눈 배바우 사람
성주댐 위 금수면, 성주의 첫 천주교 전파지 무학리 배바우마을 산자락 깎은 듯한 바위가 돋보인다. 가로, 세로 반듯이 새긴 한자(漢字)가 또렷하다. 큼직한 '강학대'(講學臺) 아래 '강사'(講師) 전종권(全鍾權)과 옆 바위의 33명 '강생'(講生). 살펴보니 전(全)씨 14명, 김(金) 6명, 박(朴) 3명, 장(蔣)·이(李) 각 2명, 도(都)·성(成)·최(崔)·하(河)·현(玄)·홍(洪)씨가 각 1명이다.
지난 날, 배움은 멀기만 했다. 도한기는 학세(學貰)와 관련, "술자리에 한 잔의 술값과 도박장에 한 번 던질 본전(本錢)에 불과하지만…저기에 쓰기를 물과 같이하고 여기에는 아끼기를 금(金)과 같이 여기니…우리 고을…자식들이 조금이라도 글을 엮어 쓸 줄 아는자 없으니 탄식스럽도다"고 한탄했다. 광복 뒤 전종권은 아이를 모아 그냥 가르쳤고 뒷날 제자 일부도 그랬는데, 제자 전종만의 '강론대'(講論臺)는 그 흔적이리라. 제자들이 뒷날 사제동행(師弟同行)을 암각(巖刻)하고 계(契)도 꾸려 모였으니 감흥 역시 남달랐으리라.
현계수 제자에게 배운 전종원(77) 씨는 "제자들은 매년 모였는데 20년 전쯤 없어졌고, 제자 자녀끼리 모이는 소식도 들었다"고 말했다. 전 씨의 아들 찬규(58) 씨는 "아버지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한문을 가르쳤고, 제자 모임에 참석했고 나는 심부름도 했다"며 "제자 자녀들이 계를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가르침과 배움의 나눔! 강학대의 교훈인가. 암각자 앞 냇물에서 사제 동행의 야외 수업도 했으리라. 절로 그 시절이 떠오른다.
◆새마을지원에 고향애 전한 재일 교포
일제 때 살 길 찾아 나라를 떠난 한국인은 500여만 명. 어찌 꿈엔들 고향을 잊으랴. 오사카 등지에 흩어진 성주인은 재일본 긴끼(近畿)지방 성주친목회를 꾸렸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 시절 고향사랑을 실천했고 오사카경북도민회 두병선(杜炳銑) 회장이 앞장섰다. 소방회관 건립비, 농로 확장비, 고향을 가꿀 3천그루 벚꽃나무도 전했고, 경북도에는 경북체육관 건립비와 새마을성금 전달 등으로 힘을 보탰다.


정부는 1975년 두 회장에게 새마을포장 훈장, 경북도민회에 대통령 표창으로 감사를 전했고 성주도 나섰다. 성주읍 충혼탑 밑 1974년 5월 16일 애향기념비를 세웠다. 수륜면 출신 두 회장과 성주인 27명 이름도 새겼다. 김수길 소설가는 '성밖숲' 작품으로 재일교포의 고향애를 그렸다. 충혼탑이 애국과 애향은 다른 표현의 같은 뜻임을 일깨우는 듯하다. 정인열 기자 oxe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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