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젖은 종이박스 의지" 오갈 곳 없는 노숙인들 '어쩌나'

밤 새도록 재난안전관리 체제 가동됐지만 빗 속 노숙인들 관리 밖 대상

18호 태풍
18호 태풍 '미탁'이 3일 오전 대구를 강타한 가운데 이날 새벽 노숙인들이 태풍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기력이 없는 노숙인들은 태풍 속에서도 야외에서 비를 맞으며 버텨야 했다. 이주형 기자.

태풍 미탁이 대구경북 곳곳에 막대한 피해를 준 가운데 오갈 곳 없는 노숙인들은 두려움 속에서 무방비로 태풍을 견뎌야 했다. 이들은 밤새 내리는 폭우를 피해 실내를 찾아 헤매거나 아예 거리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때문에 태풍 등 비상시 노숙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일 오후 10시 30분쯤 대구 중앙로역 인근 건물 입구 앞. 4명의 노숙인이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날 대구가 태풍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들면서 오후부터 줄곧 폭우가 쏟아졌지만, 이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젖은 종이박스 한 장이 유일했다.

한 노숙인은 건물 출입문 쪽으로 최대한 몸을 붙이고 얼굴 위로 우산을 펼쳐 비를 피하려고 했지만, 워낙 바람이 거세 비가 안쪽까지 다 들어왔다.

이곳에서 만난 노숙인 박태상(가명·55) 씨는 반소매 차림으로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폐 진균증, 혈전증, 재생불량성빈혈, 간경화 등을 앓는다는 그는 손을 심하게 떨었다. 박 씨는 "오늘 오전에 119구급대에 이끌려 병원에 갔는데 병이 많아서인지, 방이 없어서인지 7시간을 기다린 끝에 비를 맞으면서 돌아와야 했다"며 "지금은 실내를 찾아 들어갈 힘도 없다"고 털어놨다.

병원비는커녕 쪽방을 빌릴 형편도 안 되는 그는 종일 폐지를 모아 막걸리 1병을 산다고 했다. 진통제가 효과가 없어 선택한 차선책이다. 박 씨는 "10년 넘게 노숙인센터, 쪽방을 전전했었다. 지금은 몸에 병이 많아 시설에 있을 수도 없다"며 "태풍이 와도 오갈 곳 하나 없는 것이 처량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고개를 숙였다.

이날 오후 11시 50분쯤 반월당 지하상가 끝 지점 광장에는 노숙인 8명이 누워 있었다. 수건으로 눈을 감싸고 잠을 청하는 이들 옆에는 찢어진 우산이 나뒹굴고 있었다. 아침이 오면 이들은 다시 빗속을 헤매야 한다. 지하상가 관계자는 "오전 5시가 되면 노숙인들을 깨워 밖으로 내보낸다"고 말했다.

이날 대구시와 각 구·군청 재난관리부서는 태풍경보가 끝나는 시점까지 야간당직을 섰다. 도로침수, 차량·가로수 손실 신고 등 각종 피해신고에 즉각적인 출동이 이뤄졌지만, 태풍 속 노숙인들은 관리대상 밖이었다.

중구청 관계자는 "재해예방팀 업무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기 때문에 노숙인들이 직접 신고하거나 요청하지 않으면 구청도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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