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4층에 대한 다이어리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목 늘인 백합나무가 용학도서관 4층과 교우합니다. 이것은 오롯이 백합나무만의 일은 아니겠지요. 뿌리의 물을 우듬지까지 끌어올리는데 대략 한 달가량 걸린다니, 4층까지 엘리베이터로 14초면 닿을 수 있는데 꼬박 한 달이 걸린다는 거죠. 가지들은 흔들리면서 또 얼마나 적막한 시간을 견뎠을까요? '흔들린다'라는 동사를 가진 다는 건 행복일까요? 불행일까요? 높이를 가지는 일이 그리 신명나는 일만은 아니었겠지만.

한국의 병원에는 4층이 없습니다. 병이 호전되지 않거나 환자에게 유해하다는 근거는 어디에 없음에도 4층은 존재하지 않지요. 죽을 '사(死)' 와 발음이 같아 기피한다고들 하죠. 4층 없이 어떻게 4층 이상이 존재하나요? 'F'나 '5'로 회피 한다고 내용(4층)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4층에는 생사(生死)와 성식(性食)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과 '모던'이 있지요. '모든'은 방대한 어떤 실체의 일부분에 불과할 수 있고, '모던'은 '포스트모던'과 연대합니다.

통유리 전망의 용학도서관에서 끝내 4층이 된 백합나무, 목을 길게 빼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우뚱, 귀를 곤두세워 더 명확해지려 합니다. 키를 높이는 이유가 왠지 세상에 태어나 적어도 4층까지 자라야겠다는 고집 같고, 4층의 공기에 대한 호기심인 것도 같습니다. 저기 먹구름이 몰려오네요. 저도 4층이 되어 4층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려는 건지. 4층에 필요 없는 것까지 끌고 와 조금 쓸쓸한 얼굴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 4월, 진주의 한 아파트 4층에 불이 났습니다. 오전 4시쯤 40대 남성에 의해 주민 5명이 숨져 충격을 주었는데요. 잠결에 맨발로 뛰어내린 4층, 과묵하고 치밀한 내적 자아가 노린 4층에게 육중한 애도를 표했지요. 마음의 4층과 몸의 4층이 삐거덕 거릴 때, 눈물의 4층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를 봅니다. 탈의가 불가능한 4층은 다른 이미지로 시선을 데려가는 대신 구체적인 실재와 마주하게 합니다.

도서관의 4층이 된다는 건, 강의가 끝나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복도의 마찰음이거나 4개의 다리를 가진 책상이 되는 건가요? 내구성이 좋지 않아 잘 마르지 않는 4층의 서사, 자기가 무얼 하는지 모르는 4층이기에 아무런 생각이나 의견은 갖고 있지 않지요. 그러니까 죽을 '사(死)' 와 연관 짓는 4층의 편견은 불식되어야 마땅하겠지요.

10층 이상을, 아파트의 로얄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4층을 선호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3층은 뭔가 답답하고 5층 이상은 지면에서 멀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또한 4층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풍경엔 품격이 있습니다. 조망권 확보와 더불어 나무의 정수리도 환히 보이거든요. 4를 외면하고 비켜가려 하는 반면, '4를 지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시인도 있습니다. 안정적이고 매혹적인 높이와 함께 모든 4층은 '모던 4층'으로 존재하니까요.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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