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신 긴급조치 닮은 홍콩 '긴급규례'…"복면금지는 시작일 뿐"

긴급 명분으로 의회 안 거치고 기본권 제약법 제정 가능
검열, 인터넷 통제 등 확대 적용 가능성도…민주파 "캐리 람의 대량살상무기"

홍콩 정부의
홍콩 정부의 '복면금지법' 시행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6일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저항의 상징이 된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있다. 연합뉴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영국 식민 통치 시절의 유산인 '긴급정황규례조례'(긴급법)를 근거로 행정명령인 '복면금지법'을 전격 도입하자 의회의 행정부 견제권이 무력화되고 기본권 침해가 확대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홍콩의 민주화 진영은 사실상 사문화된 것으로 간주했던 긴급법이 52년만에 부활하면서 복면금지법 제정 자체보다 의회의 행정부 견제권을 사실상 무력화했다는 점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 앞으로 언론·출판 검열, 인터넷 규제, 법원의 영장 없는 수색 등 홍콩 시민의 기본권을 광범위하게 제약하는 추가 행정 명령을 잇달아 내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도 매우 우려하고 있다.

홍콩의 민주파 의원인 클리우디아 모는 최근 열린 긴급법 반대 기자회견에서 "캐리 람은 긴급법을 핵 폭격을 가할 수 있는 대량파괴무기처럼 쓰고 있다"며 "이 법은 더 많은 억압적인 규제 도입의 길을 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긴급법은 거의 100년 전인 1922년 영국이 식민지 홍콩에서 발생한 선원들의 파업에 대처하려고 만든 법률이다. 이 법은 홍콩 행정 수반(당시 총독)이 질서 회복을 위해 사실상 모든 규제를 도입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언론·출판 검열, 통신 제한, 육상·해상·공중 교통 통제, 인원의 억류·추방, 무역과 생산 제한, 재산 압류 및 징발, 법원의 영장 없는 시설 내 진입과 수색 허용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과거 홍콩에서 긴급법이 발동돼 행정 수장에게 사실상 '비상 대권'이 부여된 것은 극심한 폭력 사태로 50명 이상이 숨진 1967년 반영 폭동 때가 유일한 사례였다. 긴급법은 성격상 우리나라 유신 시절의 긴급조치와 닮았으며 박정희 대통령 집권 말기의 유신헌법은 행정 명령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사실상 무제한 제약을 가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홍콩의 현행 법제상으로는 긴급법에 따라 만들어진 행정명령이 사후 의회의 통제 대상이 되는지가 불명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식민지 시절 만들어진 긴급법은 행정장관이 내린 긴급 명령인 '규례'는 행정장관 자신의 판단에 의한 철회 때만 효력을 잃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로 의회의 사후 통제권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홍콩 정계 일각에서는 홍콩의 주권이 중국에 반환된 1997년부터 의회에 입법권을 부여하는 홍콩기본법이 시행된 만큼 옛 법인 긴급법에 근거해 도입된 '복면금지법' 등 모든 행정명령은 위헌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같은 논란을 의식한 듯 람 장관은 '복면금지법'을 이달 중순 개회하는 입법회(의회)의 심의에 부치겠다고 공언했다. 현재 홍콩 입법회 의석 70석 중 '건제파'(建制派)로 불리는 친중파가 넉넉한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복면금지법이 사후 승인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김지석 선임기자 jiseok@imaeil.com·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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