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운동 삼아 자주 나가던 금호강도 지금쯤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겠다. 지금 반짝이는 건 금호강 물만이 아니다. 강을 따라 군락을 이룬 갈대도 자신이 강물인 양 은빛 물결로 흔들리고 있겠다.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사람은 강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고 살아왔다. 낙동강 주변에서 한 시대를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녹여낸 시집 한 권이 강물처럼 흘러 내게로 왔다.

윤일현 시인은 입시를 앞둔 학생들에게 진학지도와 상담을 하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독서를 하는 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시집 '낙동강'으로 등단해 여러 권의 다른 시집과 인문서를 출간하고 '낙동강이 세월이고 나입니다'로 다시 낙동강으로 되돌아왔다. 강이 들려주는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25편의 시와 1편의 산문에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방문을 열어놓고/ 누님과 단 둘이 음복을 하는데/ 마당의 개 세 마리/ 갑자기 방안으로 훌쩍 뛰어들더니/ 누님의 밥그릇에 주둥이를 박고/ 평소대로 누님과 같이 밥을 먹었다/ 누님의 가슴속엔/ 빨치산과 국군이 함께 살고/ 누님의 밥상과 밥그릇은/ 개와 사람을 구별하지 않았다
-p18~19 '밍밭골 육촌 누님' 일부
자식 셋을 모두 앞세운 어미가 첫째 아들 제삿날 둘째가 생각나서 지방에 둘째 이름도 올리고 그러고 나니 딸도 생각나 잔 세 개 놓고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는 다음에 이어지는 연의 내용이다. 누님에게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빨치산과 국군, 개와 사람을 굳이 구분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삶이 되었다.
달빛의 무게도/ 감당하기 힘들어/ 돌아보니/ 안개 자욱하다/ 세월의 강//겨울 강에/ 발 담그고 있는/ 마른 갈대처럼/ 종일 시린 발목으로 서서/ 막막한 그리움/ 칼바람에 실어 보내며/ 꽃피는 봄날 기다린다./ 사랑아, 내 사랑아//
-p52 「다시 강변에서」 전문
뉴스를 접하면 잠시도 조용한 날이 없다. 그래도 살아가는 일은 늘 힘든 일만 일어나는 것도, 늘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기에 겨울 뒤에 봄이 오는 것처럼 '꽃 피는 봄'에 대한 기대도 살짝 가지게 된다. 그런 희망이 있기에 지금 선 자리가 겨울 강에 발 담그고 시린 발목으로도 서서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진보든 보수든 주기적으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양평 두물머리에 나가 보라. 어디에 살든 작은 지류와 지류, 큰 지류와 본류가 합쳐지는 곳에 나가 해돋이와 낙조에 물드는 풍경에 오래 잠겨 있어 보라. 그리고 주기적으로 동해와 남해, 서해로 나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라." -p63
4대강 사업으로 유속이 느려진 곳에서는 녹조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녹조 라떼'라는 말을 만들어 비꼬기도 한다. 썩은 물이 되지 않으려면 강물은 무조건 흘러야 하는데 저자는 흘러야 하는 것은 강만이 아니라고도 말한다. 우리의 의식도 고여 있거나 닫혀 있으면 강처럼 병든다는 시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강의 신음에 귀 기울여 병을 더 크게 키우지 않는 현명한 독자가 되기를 시인은 바라고 있을 것이다. 시인은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에서 출발하여 금호강을 비롯한 크고 작은 지류들을 찾아다니며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고 한다. 강과 사람이 품고 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궁금한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손인선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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