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창원의 기록여행] 대구부민의 유령생활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대구부의 인구통계에 나타난 대구부민의 직별을 보면 총인구 33만6천524명 중 유직자가 10만9천676명이고 무직이 총인구의 약 7할인 22만6천848명이라는 놀라운 숫자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숫자로 미루어 보아 대구부민은 거의 전부가 유령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9월 25일 자)

대구부에 사는 사람 10명 중 7명은 무직자였다.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는 것은 유령생활에 빗대졌다. 일자리 없이 굶주리며 거리를 헤매는 부민들이 넘쳐났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걸까. 해방 이후의 극심한 경제'사회적 혼란의 영향이 첫 번째 원인이었다. 식량난과 물가 폭등은 허약한 경제적 기반을 급속히 붕괴시켰다. 콜레라 같은 전염병의 후유증도 컸다.

이렇듯 무직자 숫자가 많은 것을 두고 실제로는 부풀려진 게 아니냐는 의심도 나왔다. 겉으로는 무직자지만 부정 사업 등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부패가 만연한 사회 현실을 꼬집은 것이었다. 모리배들이 물자를 빼돌려 물가 폭등을 부추기며 서민들에게 고통을 안긴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심지어 부민들에게 나눠줄 사탕마저 가로채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국의 발표조차 불신했다.

대구는 조선의 도시 중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도시였다. 해방 직후 한때는 전재 동포들의 인기 도시이기도 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며 서울이나 부산 같은 항구도시에 비해 전재 동포의 정착 숫자가 줄었다. 대구는 귀환 동포 등의 외부 유입이 적어 해방 직전에 비해 7만여 명의 인구가 불어나는 데 그쳤다. 그런 점에서 대구의 높은 실업문제는 타 도시와 비교됐다.

경북도 전체로 보면 45만 명의 실업자 중에 10만 명은 토착 극빈자였다. 이 같은 극빈자를 빼더라도 무직자는 넘쳤다.

토착민이 이럴진대 귀환 동포가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토착민보다 실업 비율이 높은 건 당연했다. 애초 대구에는 칠성동과 원대동 등 8곳에 전재 동포 수용소가 있었다. 영주, 김천 등에도 수용소가 만들어졌다. 어디든 가릴 것 없이 수용소의 동포들은 입에 풀칠하기 위해 허덕였다.

실업문제가 이렇듯 심각해도 당장의 뾰족한 해결책이 있을 리 없었다. 그나마 돌아가던 공장은 전력과 원료품 부족으로 상당수 문을 닫았다. 경북도는 실업자 구제용으로 광산 개발을 추진했다. 또 1948년 봄에는 경북후생회가 나서 공장에 600여 명을 취업시켰다. 그때도 건설 현장은 일자리를 만드는 데 유효했다. 대구종합운동장 건설공사에 2천 명의 노동자를 알선했다. 또 대구천 제방공사를 시작해 수천 명의 일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대구부와 경북도의 노력은 곧 한계에 부딪혔다.

중앙정부가 200만이 넘는 전국 실업자의 구호 대책으로 190억원의 예산을 책정한 데 목을 맨 이유였다. 대구부민은 유령생활을 벗어났다. 그래도 걱정은 남았다. 그 허깨비가 행여나 다시 돌아올까 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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