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티벳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은 걱정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지요. 걱정 없이 살 수 없어서인지 걱정에 관한 명언들이 참 많더군요.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우리는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난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 때문에 걱정 한다'고 했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는 '남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할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들은 그렇게 그대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데이모스는 '걱정의 신'입니다. 공포의 신, 불화의 신, 싸움의 신과 늘 함께 다녔지요. 이런 데이모스 포로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심각하고, 엄숙하고, 폭발직전이어서 '되는 일은 없고, 꼬인 일은 자꾸 꼬인다'고 하죠. 그런데 '신'을 얼마만큼 믿나요? 신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라는 버나드 쇼의 말에 빗대자면, 결국 신은 우리가 만드는 거니까 우리가 부모인 거죠. 걱정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걱정의 신을 창조하고 있어요. 상징이나 비유 없이도 '신'이라는 단어를 시에 사용하는 것처럼.
신과 가까운 걱정이 '생활'에게 자꾸 묻습니다. 가령, 집을 나선 후 "가스 불을 껐나?"에서 시작하여 "불이 나면 어쩌지?"란 걱정을 낳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 가스를 확인하게 되지요. 그렇게 시간이 지체되면 "약속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미리 연락해야 되겠지?"하는 식으로 순환되는 걱정의 굴레를 살아갑니다.
어떤 불확실이 불행의 결말로 끝날 것이라는 막연함은 해롭지만, 생각 자체가 1도 없는, 긍정의 긍정은 오히려 미래를 설계하는 힘을 무력화시키기도 합니다. 행복한 삶에 대한 다양한 연구에 따르면 걱정의 대부분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요.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퍼센트는 절대 일어나지 않고, 나머지 걱정의 30퍼센트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하지요. 22퍼센트는 사실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고민이고, 4퍼센트는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랍니다.
시대의 '질병'이 되어가는 '걱정에 대하여'의 저자는 걱정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떨림'의 일종으로 정의합니다. 아직 오지 않거나 올 리 없는 미래를 걱정하느라 마주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절망이 '걱정할 권리'를 포기한 채 정답만을 원하기 때문이지요. 하늘에서 정답이 뚝, 떨어져도 그 정답대로 살아가지도 못하면서 말이지요. 만약 정답대로 산다면, 살아진다면, 걱정이 사라질 수는 있겠지만 내가 '선택할 권리'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지요. 정답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걱정이란 놈과 한 몸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걱정과의 '밀당'으로 거리두기가 필요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 삽입곡 한 소절을 덧붙여 봅니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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