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文의 책임 회피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지배층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 가장 뻔뻔한 사례를 꼽으라고 하면 일본의 무조건 항복 후 미군 제1진이 일본에 상륙한 1945년 8월 28일, 당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 총리가 발표한 '1억 총참회론'를 들 수 있겠다. "…일이 여기에 이른 것은 물론 정부의 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민이 도의를 잃은 것도 (패전의) 한 원인이다. 일억 총참회야말로 국가 재건의 첫걸음이자 단결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히로히토(裕仁) 천황(天皇)이 져야 할 침략전쟁의 책임을 희석하는 것으로, 이를 두고 일본 역사소설가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는 모두가 나빴으니 서로 책망하는 것은 그만두자는 '대충주의'로 귀결돼 천황에 대한 처벌 장애물로 기능했다고 비판한다. 저명한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도 나치 패망 뒤 독일 일각에서 제기됐던, '독일인 전체의 죄'라는 호소에 같은 비판을 했다. "우리 모두에게 죄가 있다"는 소리는 독일인이란 집단 중에서 실제로 죄를 지은 개인을 숨겨줄 뿐이라는 것이다.

히로히토의 '죄'를 희석하는 작업에 지식인들도 가담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는 등 조선 식민사학을 만든 쓰다 소치키(律田左右吉)이다. 그는 1946년 4월에 발표한 '건국의 사정과 만세일계의 사상'이란 논문을 통해 '1억 총참회론'을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일본을 잘못된 길로 이끈 것은 '다수 국민'에게 그 책임이 있다. 황실(皇室)은 시대 추세의 변화에 순응해 그때그때의 정치 형태로 적합했으나, 국민은 그렇지 않았다. 국민은 위정자에게 국가를 맡겼고, 결국 그들로 인해 국가가 궁지에 빠졌기 때문에 천황을 비난할 게 아니라 오히려 국민이 스스로 반성하고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변'(辯)은 이런 책임 회피의 전형이다. '조국 사태'로 우리 사회가 큰 진통을 겪은 데 대해 국민에게 송구하다면서도 정작 조 장관 임명을 강행함으로써 그 진통을 야기한 자신의 '근원적' 책임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특히 언론이 신뢰받도록 자기 개혁을 위해 노력해 달라며 언론에 화살을 돌린 것은 일본 위정자들의 '국민 탓'의 '문재인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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