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靑谿) 정종여가 1941년 그린 '가야산 10폭 병풍' 중 마지막 두 폭이다. 20대의 나이에 가야산이라는 큰 주제와 대결한 기개와 이만한 대작으로 그려낸 실력이 놀랍다. 가야산 곳곳의 풍광을 한 폭 한 폭 짜임새 있게 완성하면서도 마치 10폭이 연결된 연병(連屛)처럼 각 폭을 배열해 필력 뿐 아니라 구성력도 대단하다는 감탄이 나온다.
오른쪽의 제9폭에는 해인사를 그렸다. 화면 중간쯤 삐죽 솟은 고목(枯木) 두 그루 사이로 해인사 당우를 그려 넣었고 일주문 아래에는 소매 넓은 장삼과 적갈색 가사를 '수'한 스님 두 분도 보인다. 제10폭은 해인사 산내 암자 중 한 곳일 산등성이 암자와 밭에서 일하는 사람, 그 옆 둔덕에 스님과 갓 쓴 양반 등 세 명이 그려져 있다. 화제는 "신사하일(辛巳夏日) 가야산하(伽倻山下) 청계도인 사(靑谿道人寫)"이다.
가야산 봉우리 아래 큰 나무들이 우뚝 우뚝한 산자락에 자리 잡은 집과 절을 그린 실경산수이면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점경인물로 그려 넣어 산수와 풍속을 결합했다. 나머지 8폭에도 산촌의 남녀노소와 승속(僧俗)의 인물이 각자의 일을 하고, 볼 일을 보는 모습으로 그려져 주변에 대한 화가의 관심어린 시선을 보여준다. 한 때 해인사에 살았던 정종여에게 익숙한 가야산이고 안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산수와 인물, 국토와 현실이 함께 화폭에 담겨있어 삶의 배경이자 터전으로서 가야산이 생생하다.
정종여는 가야산에서 멀지 않은 거창 읍내에서 태어나 16살에 거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어떤 이유인지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살았는데 그림 재주가 뛰어나 해인사 주지스님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그림 유학을 갈 수 있었다. 25살 때 6미터가 넘는 진주 의곡사 괘불 '석가여래좌상'(652×355㎝)을 그렸고, 이 '가야산 10폭 병풍'을 그린 28살 때 팔공산 부인사에 3칸 규모 벽화를 그렸던 것이 '선덕부인 존영 봉안식' 기념사진 속에 남아 있다. 화가로서 금어(金魚) 역할을 하며 대구에도 필적을 남겼던 것이다.
1942년(29세) 오사카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두 차례 개인전을 여는 등 왕성하게 활동 했지만 육이오동란 중인 1950년 북쪽으로 납치되어 한 때는 남한에서 지워진 인물이었다. 동란 중에는 해인사가 없어질 뻔 했던 일도 있었다. 1951년 8월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중 해인사 폭격 명령을 받았지만 김영환(1921-1954) 준장이 끝내 폭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문화재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부는 2010년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킨 그의 공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김영환 준장은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최초로 착용해 이를 제도화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전쟁기념관이 선정한 2019년 '10월의 호국인물'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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